【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6<

고산(高山)앞바다서 배 침몰 수장

삼을나(三乙那)(2)
탐라(耽羅)상륙 지맥·물혈 끊은 송(宋)나라 호종단(胡宗旦)

『죽음이 없는 나라가 있다』 당시 중국(中國)에서는 해동(海東)에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섬나라가 있어 불사초(不死草)가 자라고 그 곳 사람들은 신선처럼 오래 산다고 믿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서시(徐市)를 파견한 이후인 고을나(高乙那) 13세 위왕(偉王)때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도 탐라(耽羅)에 불사초가 자란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은 금광초(金光草)와 옥지지(玉脂芝)를 구하여 돌아가 『삼신산(三神山)에는 기이하고 신기한 화초가 많이 있다』고 아뢰었다.
옥지지(玉脂芝)는 뿌리가 없이 자라는 식물로 명산(名山)에서 나는 불사초였다.
가장 좋은 것이 말모양, 그 다음이 인간의 모양, 가장 좋지 않은 것이라도 육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15세 후왕(厚王)에 이르러 왕(王)은 아우 청(淸)·이(季)형제와 같이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였다.
이 때에 남쪽 하늘에 객성(客星)이 나타나 다른 나라의 사신이 조회할 징조라고 했는데 마침내 이들이 도착하였으므로 신라왕(新羅王)은 크게 기뻐했다.
후왕(厚王)에게성주작(星主爵)을 주고 청(淸)은 친 아들과 같이 사랑한다는 뜻으로 왕자작(王子爵)을 주고 이(季)는 도내직(徒內職) 벼슬을 주었다.
신라(新羅) 석탈해왕이 즉위한 다음해 17세 선주왕(善主王)은 사신을 보내어 석(昔)씨가 박(朴)씨의 왕위를 이어받은 것을 축하하였다.
20세 문성왕(文星王)때 였다.
바다에 파도가 넘치고 비바람과 안개가 자욱하며 뇌성이 진동하여 불이 일어나 바다 물을 끓게 하였다.
독기 찬 화염이 바다에 떨어져 남(南)으로 달리는 조류는 붉은 불 기운을 이끌고, 북(北)에서 오는 조류는 흰 거품을 품었다.
또 물결이 침을 뿌리는가하면 뱀은 독기를 쏘아 사람을 상하게 하는 변이 여러해 계속하였다.
이에 산신령과 해백(海伯) (주해신·主海神)에게 제사하였으나 신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한라산(漢拏山)북쪽에 단을 설치하여 목욕재계하고 소머리를 삼신(三神)의 영전에 바쳐 제사를 지냈다.
이로부터 바다가 맑아지고 하늘이 개이며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화락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삼성(三姓)신사를 세워 춘추로 제향을 모시게 되었다.
35세 원왕(遠王)은 지금의 한경(翰京)면 죽도(竹島)에서 저절로 소리가 나는 신죽(神竹)을 얻어 신라(新羅)의 신문왕(神文王)에게 바쳤다.
신문왕은 이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비가 올때 불면 비가 개고 가물 때에 불면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에 불면 바람이 자고 파도가 일 때 불면 바다가 잔잔해졌다.
그러므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지었다.
38세 치도왕(致道王)때 남번국(南藩國)사람들이 신라(新羅)사람 김암(金巖)의 병법을 배우고자 하여 천지(天地)의 이기(理氣)를 살피고 바다를 건너 탐라에 표착하였다.
탐라에서 이들이 가지고 온 화완포(火浣布) 2단(段)을 얻어 그 사유를 물었다.
하나는 빙잠(氷蠶)고치로 직조한 5색무늬의 비단인데 요(堯)임금시대에 해인(海人)이 바쳐서 임금의 옷을 만들었던 것이고, 하나는 불쥐(火鼠)의 털로 짠 비단인데 위(魏) 명제(明帝) 2년에 서역(西域)에서 조공한 것이다.
이 두가지 비단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오히려 새 물건과 같이 세탁이 되므로 화완포라 이름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빙잠은 길이가 7촌으로 비늘과 뿔이 있는데 서리와 눈이 와야만 실을 토하여 고치를 짓고, 불쥐는 남황화구(南荒火丘)에 있는 것으로 백모(白毛)길이가 두자이고 무게가 백근인데 물에 닿으면 죽는다 하였다.
45세 자견왕(自堅王)은 겨우 5년 재위하였다.
무술(戊戌)년 12월에 태자 말노(太子 末老)를 고려에 보내어 입조(入朝)하였다.
한편 이도(二徒)에 자리잡은 양을나(良乙那)는 왕위가 1백8세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양을나(良乙那)는 기원전 2332년에 나라를 열고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조와 국교를 가졌다.
요순에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재위 1백년만에 숨지니 2세 을나왕이 즉위하자 단군(檀君)이 사신을 보내와 즉위를 축하했다.
4세을나왕은 기원전 2104년 즉위했는데 이 해에 벽랑국이 사신을 보내 하례했다.
54세 을나왕때에는 발조선(發朝鮮)[발해(渤海)]와 통교하다.
91세 을나왕때 고구려(高句麗)가 사신을 보내 가[(珂)산호]를 구한 이후 계속해서 94세 을나왕 26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사신을 보내왔다.
93세 을나왕 20년(A.D 477)에 사신을 백제(百濟)에 보내 공물을 바치고 은율(恩率)의 증(爵)을 받다.
96세 을나왕때인 559년 양탕(梁宕)이 신라(新羅)에 사신 광순사(廣巡使)로 가니 접무사(按撫使)로 부계양(夫繼良)이 수행했다.
이 때에 신라(新羅)조정으로부터 중상(重賞)과 증록의관(爵祿衣冠)을 받았으며 양(良)성을 양(梁)으로 고쳐 쓰게 되었다.
108세 을나왕이 907년에 즉위했으나 6년만에 왕이 연로하여 삼신인(三神人)이 사석(射石)하던 법을 취하니 고자견(高自堅)이 비로소 나라를 받았다고 한다.
세 신인은 고려(高麗)때까지 그 영(靈)이 남아 나라를 지켰다.
고려(高麗)때 송(宋)나라 사람 호종단(胡宗旦)이 지맥과 물혈을 끊기 위해 탐라(耽羅)에 왔다.
그는 섬 동쪽 구좌(舊左)읍 종달(終達)리로 상륙하여 서쪽 한경(翰京)면 고산(高山)리까지 섬을 샅샅이 뒤지며 지맥을 누르고 물혈을 떴다.
제주(濟州)에서는 이때 지맥·물혈이 끊겨 큰 인물이 나지 않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호종단(胡宗旦)이 배를 띄워 돌아갈 때 였다.
삼성혈(三姓穴)의 신이 사나운 매로 변신하여 날아 올라 그 배의 돛대위로 내려 앉았다.
배가 막 차귀도(遮歸島)앞에 다다랐을 때인데 큰 바람이 일며 물결이 소용돌이 쳤다.
배는 풍랑을 이기지 못하여 차귀도(遮歸島) 암석사이에 침몰했다.
땅을 좌우하던 호종단(胡宗旦)이었지만 바다는 이기지 못하여 수장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고산(高山)앞바다의 이 섬을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하여 차귀도(遮歸島)라 부르게 됐다.
그 영이(靈異)함을 기려 광양당(廣壤堂) [삼성혈(三姓穴)]은 국당(國堂)이 됐다.
배가 나가려던 포구의 인근에 차귀당(遮歸堂)이 설립돼 사람들이 섬겼으며 이 당이 있는 산을 당산봉(堂山峯)이라고 부르게 됐다.
두 당은 호국신사였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광양당(廣壤堂)이 삼성사(三姓詞)로 변모

고(高)씨와 양(梁)씨가문의 「왕세기」의 기록은 다른 지역에서 기록된 사서와 연대가 다른 부분이 많다.
물론 5천여년전이라는 삼을나(三乙那)의 탄생시기도 마찬가지다.
제주대(濟州大)의 이청규(李淸圭)교수[고고학]는 도내에서 농경과 관련된 토기가 출토된 시기를 보아 삼을나(三乙那)가 도읍하던 시기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어간일 것으로 보고 있다.
광양당(廣壤堂)은 제주(濟州)에서 가장 큰 신당이었다.
이 당은 유교제례가 일반화된 조선조(朝鮮朝)이전에는 탐라국(耽羅國)의 국당(國堂)으로 여겨졌으며 이 곳에서 나라의 제의가 치러졌을 것으로 보인다.
옛 문헌과 사적으로 보아 광양당(廣壤堂)과 삼성혈(三姓穴)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朝鮮)의 유교정책으로 당(堂)은 삼성사(三姓祠)로 변했으며 제의도 유교식으로 바뀌어 옛 왕족인 고(高)·양(梁)·부(夫) 세 성씨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기 제의중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도백(道伯)을 초헌관으로 함으로써 옛날 탐라국(耽羅國) 시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 있다.
호종단(胡宗旦)을 바다에 수장시킨 신화는 원래 광양당(廣壤堂)의 신화였으나 광양당(廣壤堂)이 삼성사(三姓祠)로 바뀐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당(堂)의 신화에 삼성(三姓)신화가 접목되어 현재의 신화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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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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