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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종단(胡宗旦)(2)
섬전역이 호종단(胡宗旦)의 서슬에 질려있을 때 탐라(耽羅)에서는 유일하게 덕을 본 사람이 있었다.
호종단(胡宗旦)이 토산(兎山)리를 떠나 남원(南元)읍 의귀(衣貴)리 경에 들어섰을 때였다.
넓은 들판에서 말똥을 줍는 두 부부를 만났다.
말똥은 당시 난방용으로 불을 땠으며 타다 남은 재는 메밀이나 밭벼의 거름으로 쓰면 곡식이 잘 되었다.
정의(旌義)벌판을 헤매느라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던 호종단(胡宗旦)은 이 농부들에게 식사를 청했다.
『여보, 뭐 먹을 것 좀 없소』
『찬 밥이라도 좋다면 있소이다』
마음씨 착한 두 부부는 자신들이 먹을 점심을 내주었다.
보리밥에 물을 훌훌 말아 배불리 먹은 호종단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몹쓸 짓을 하며 다니던 그였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
두 부부를 보아하니 행색이 초라하고 영판 잘 살기에는 그른 인상이었다.
보답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호종단(胡宗旦)은 『노부모가 있을 듯 한데 좋은 묘자리나 보아 두었소?』하고 넌지시 물어봤다.
『묘자리는 무어. 살 집도 제대로 없는데요』 농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좋은 산자리나 있으면 봐 달라』고 부탁했다.
땅에 못을 박은 호종단(胡宗旦)은 『이것을 가만히 밟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발을 떼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호종단(胡宗旦)이 먼 오름으로 가서 용맥(龍脈, 지맥)을 밟아오기 시작했다.
나그네가 한참동안을 오지 않는데다 발바닥이 간지러워 오기 시작하자 농부는 슬그머니 발을 뗐다.
그순간 비둘기 한마리가 발바닥에서 푸드득 뛰쳐나와 날아가 버렸다.
농부는 『아차』하고 화급히 발을 질끈 밟았으나 때는 늦었다.
호종단(胡宗旦)이 돌아와 『어찌 된 일이요?』하고 물었다.
『발이 뜨거워서 할 수 없이 잠깐 들었더니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갔소』
혀를 찬 호종단(胡宗旦)은 『할 수 없오. 아직 지기(地氣)가 남아있으니 여기에 산을 쓰고 비둘기가 날아간 곳에는 집을 지으시오』
『가난한 사람이 새 집 지을 처지가 되오』
『아따, 거 큰 쿳가시나무 자르지 말고 그 위에 초막이나 얹고 살면 될 거 아니오』
터를 잡아준 호종단은 농부에게 길을 물어보고는 서쪽으로 떠났다.
농부는 호종단(胡宗旦)이 가르쳐 준대로 이곳 속칭「반디기왓(밭)」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때 호종단(胡宗旦)이 찾아 준 혈은 마혈(馬穴)이었다.
이 혈은 제주(濟州)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혈중의 하나인데 이때문에 제주(濟州)에서는 말들이 크게 잘된다고 한다.
이후 조선조(朝鮮朝)에는 섬전역에 국마장(國馬場)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곳에 터잡은 농부의 집에 그 해에 비루먹은 말 한 마리가 찾아와 기웃거렸다.
불쌍히 생각해 길러줬더니 해마다 새끼를 낳아서 한 마리가 두 마리, 두 마리가 네 마리, 여덟 마리가 됐다.
농부가 하는 일은 모두 재산으로 연결됐다.
방목하다 잃어버린 말은 해가 지나면 다른 말 열 마리, 백 마리를 이끌고 돌아왔다.
말로 인해 크게 부자가 된 이 농부는 경주 김(慶州 金)씨의 선조라고 전해 진다.
후세인 김만일(金萬鎰)은 수천 마리의 말을 기르게 됐으며 조선조(朝鮮朝) 왜적이 침입하여 「7년전쟁」이 한창이던 1594년에는 조정에 말 5백필을 헌납하여 헌마공신(獻馬功臣)이 된다.
김만일(金萬鎰)은 이후 해마다 말을 바쳐 목사보다 더 높은 계급의 감목관(監牧官)직을 제수받아 대대로 세습하였다.
농부의 가문에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던 당시 다른 주민들은 『감목관집의 말떼, 말떼』하는 감탄사를 연발해 그 후에도 말이 많은 것을 보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서쪽으로 간 호종단(胡宗旦)은 안덕(安德)면 사계(沙溪)리 산방산(山房山)에 이르렀다.
평지에 불뚝 솟은 산방산(山房山)의 모습은 장대한 남자의 기상 그것이었다.
산 밑에는 거대한 용이 머리를 내놓고 있어 물결에 따라 산방산(山房山)을 이끌고 중국(中國)을 향하여 사계(沙溪)앞바다의 형제섬 너머까지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다.
호종단이 중국(中國)에서 올 때부터 염두에 뒀던 왕후지지(王侯之地)가 틀림없었다.
이 형세를 그대로 두면 왕후장상이 태어나 천하를 주름잡을 게 뻔했다.
용이 목을 빼기를 기다린 호종단은 잔등을 힘껏 끊었다.
끊은 자국에서는 벌건 피가 솟구쳤다.
사정없이 내리 끊노라니 꿈틀거리던 용이 조용해졌으며 흘러내린 피는 주변 땅을 벌겋게 적셨다.
혈이 끊긴 용머리는 산방산(山房山)을 끌고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때문에 제주(濟州)에서는 왕도 큰 장수도 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또 용이 채 나가기 전에 혈을 끊었기 때문에 화순항(和順港)도 크지 못해 지금의 규모밖에 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산방산(山房山)아래는 용머리와 잔등이 잘린 것 같은 용의 모양이 남아있다.

미니해설
신화 속의 농부는 경주 김(慶州 金)씨의 선조라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전래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주 김(慶州 金)씨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입도조(入島祖)는 조선 태종(朝鮮 太宗) 2년(1402년)께 제주(濟州)에 왔다고 말하고 있다.
호종단(胡宗旦)은 고려(高麗)중기의 인물이므로 신화의 시기와 맞지 않는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김(金)씨가문의 말이 크게 번창하자 호종단의 이야기와 뒤늦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등에 의하면 호종단(胡宗旦)은 고려 예종(高麗 睿宗)때 인물로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郎舍)에서 사관(史官)직인 종5품 기거랑(起居郞)·기거사인(起居舍人)직을 지냈다.
원래 송(宋)나라의 복주(福州)태생으로 중국(中國) 절강성에 있다가 상선을 타고 고려(高麗)에 귀화했는데 예종(睿宗)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호종단(胡宗旦)은 이야기에 나타나듯 송(宋)나라에서 파견된 게 아니라 고려(高麗)에서 파견된 것으로 보이며 파견시기는 예종(睿宗)의 재위기간인 1105년에서 1122년어간인 것으로 보인다.
예종(睿宗)은 재위중 윤관(尹瓘)을 파견해 북쪽의 여진족을 경략해 9성을 쌓도록 했던 인물로서 호종단(胡宗旦)을 탐라(耽羅)로 파견했던 것은 그의 남방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濟州)가 고려(高麗)의 군이 된 것은 숙종(肅宗)10년인 1105년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문헌상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중앙관헌은 최척경(崔陟卿)으로 1161년에 파견됐다.
그러므로 호종단(胡宗旦)의 임무는 정치적인 복속이전에 정신적인 사전정지작업이었을 것이다.
호종단(胡宗旦)이 실제로 많은 혈을 끊었는지 아닌지는 증명하기 힘들되 이러한 소문이 퍼지기만 했어도 주민들은 한풀 기가 꺾이어 『우리는 이제 지방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 호종단(胡宗旦)이 차귀도(遮歸島)앞바다에서 수장됐다고 하나 실제로는 잘 살았다고 하므로 호종단(胡宗旦)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의식이 강한 도민들이 나중에 지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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