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21<

사랑에 눈먼 자청비 하인에도 속아

자청비(2)
“점심 지고 문도령찾아 산속 헤매는 수모”

술상을 마련하고 마주 앉으니 한잔은 인사주, 두잔은 대접주, 세잔은 친구주, 합환주,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삼년 눈속인 사랑을 풀었다.
날이 새자 문도령은 복숭아씨 한 방울을 내주며 꽃이 피기까지는 돌아오마고 약속하고 옥황으로 길을 떠났다.
자청비는 창밖에 복숭아씨를 심었는데 꽃이 피고 열매가 열어 따 먹은 후에도 문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사한 봄날 남(南)창을 열었더니 남의 집 종들이 나무를 해 오면서 진달래꽃·철쭉꽃을 손에 들고 오는 게 보기에 좋았다.
구경삼아 밖으로 나오는데 「정이 어신(없는) 정수남(하인)」이 햇살 바른 짚눌(낟가리)밑에 앉아 옷을 벗어 이를 잡는 것이 보였다.
『더럽고 추접한 정수남아, 밥은 돼지같이 먹고 놀기만 하겠느냐. 다른 집 수장남(머슴)들은 산에 가서 장작도 해 오고 꽃도 따서 들고 오니 오죽 보기가 좋으냐』
정수남의 생각에는 문국성 문도령을 만나지 못하는 자청비가 원풀이를 할 데가 없어 엉뚱한 데 화풀이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말 아홉마리에 소 아홉마리, 황기도끼를 차려 주면 나도 나무를 해오리다』
정수남은 신산만산 한라산속 깊이 들어가 큰 팽나무가지에 소와 말을 묶어두고 그늘에 누워 코를 골며 낮잠을 잤다.
정수남이 잠을 자는 사이에 봄볕에 쪼인 소·말들이 모두 목이 말라 죽어버렸다.
걷어놓은 나무에 불을 살라 소·말고기를 올려 놓고 손톱으로 껍질을 벗기며 「익었을까」 한 점, 「설었을까」 한 점 고기맛을 보다보니 소 아홉·말 아홉마리를 다 먹었다.
날이 저물어 가자 소·말가죽을 짊어지고 내려오는데 오리소(못)에서 청(靑)오리들이 노는 게 보였다.
『고운 것만 좋아하는 우리 상전님. 오리나 잡아다 드려 화를 풀자』
황기도끼를 휙 잡아던졌으나 오리는 다 날아가고 도끼만 연못속에 빠지고 말았다.
옷을 벗어 제낀 정수남이 연못속으로 들어가 도끼를 찾는 사이에 난데 없는 도둑놈이 소·말가죽에 옷까지 모두 훔쳐가 버렸다.
칡덩굴로 겨우 몸을 가린 정수남이 마을로 내려왔는데 차마 상전앞에 나서질 못하고 장독대에 들어가 항아리속에서 잠을 잤다.
아침에 정하님(여자 하인)이 반찬을 하려고 장독대로 왔더니 정수남이 잠자는 숨소리에 간장독의 뚜껑이 들썩들썩했다.
겁이 난 정하님이 돌멩이를 들어 던지자 삼년 묵은 간장독이 와싹 부서졌다.
『상전님. 흉험이 났습니다. 간장독이 걸어다닙니다』
자청비가 나와봤더니 꾀벗은 정수남이 어기적거리며 기어나왔다.
『아이고 누추하고 더러운 놈아. 이게 무슨 꼴이냐』
『신산곶(숲)에 나무하러 갔다가 문국성 문도령이 옥황선남선녀들과 놀이하는 걸 보다보니 정신이 없어 소·말 다 없어지고 이 꼴이 됐습니다』
정수남이 얼른 둘러치자 사랑에 눈이 먼 자청비가 그만 깜박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문도령이 정말 왔더냐』
『장고치는 모습이 볼 만 합디다』
『나도 그곳에 갈 수 있느냐』
『종도 가는데 상전이 못갑니까』
능청스런 정수남은 길이 멀어 음식이 많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어 상전몫으로 메밀 다섯되에 소금 다섯 줌을 놓아 범벅을 만들고 자기 몫으로는 소금을 넣는둥 마는둥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
뒷날 아침 출발하려는데 정수남은 말안장을 얹으며 그 밑에 소라껍질 하나를 집어넣었다.
자청비가 말에 올라타자 말이 갑자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상전님이야 오늘 산에 가면 문도령을 만나 좋은 영화 누리겠지만 죄없는 말이야 무슨 영화가 있겠습니까. 말머리고사(告祀)를 지내야 성질을 죽일 것 같습니다』
닭 한마리 잡고 밥 한동이에 술 한동이 재물을 마련하여 고사를 지내는데 정수남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는 척 하며 말귀에 술을 들이 비웠다.
술이 귀에 들어가서 말이 머리를 탁탁 털자 정수남이 말했다.
『말이 이제는 그만 먹겠다고 합니다. 말이 먹다 남은 것은 종이 먹는 법입니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신 정수남이 자청비를 재촉하여 다시 길을 떠나려고 했으나 말은 또 펄쩍 뛰었다.
『안되겠습니다. 제가 먼저 말을 타서 길을 들일테니 상전님은 점심을 짊어지고 잠시만 따라 오십시오』
안장밑에서 소라껍질을 빼내고 말을 탄 정수남은 휘휘 달려 먼 동산으로 먼저 갔다.
짐이라고는 생전 져보지 않은 자청비가 무거운 점심을 지고 산길을 걸으며 치맛자락은 가시나무에 걸려 찢겨지고 등은 아프고 발은 물집이 생겨 터지는 사이에 정수남은 실컷 잠을 잘 잤다.
『인정사정 없는 놈아, 내 말은 너가 타고 너 짐은 내가 지고 오는데 잠만 잘 수가 있느냐』
『말머리를 돌리려니 다시 성질을 부릴까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배가 고프니 밥이나 먹고 가자』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수렵사회서 농경사회로 바뀌는 과정 묘사

농경과 토지, 곡물의 신이 될 자청비는 구술자와 본에 따라 자청(自靑)비라고도 하고 자충희(自充姬)라고도 한다.
스스로 충족됐다는 뜻의 자충희는 동물이나 사람들처럼 암·수의 교접이 없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곡물의 속성을 빗댄 이름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곡물도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풍요로움에 이를 수 없다.
사랑에 아직 미숙한 자청비에게는 아직 곡물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청비의 신화는 인간에서 신으로의 전이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성숙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자청비는 3년동안 남자와 한방에 자면서도 사랑을 느끼거나 고백을 하지 못하다가 문도령이 떠나간다는 사실을 접하고야 여자의 신분을 밝히고 사랑을 나누었다.
또 봄이 되어 꽃만 이뻐하는 자청비의 모습에서는 아직 소녀의 티가 없어지지 않았다.
단지 문도령에 대해 그리움을 느끼는 정도로 여성성이 드러날 뿐이다.
그리움에 눈이 먼 자청비는 분별력이 없어져 하인인 정수남의 꾀에 속아 넘아가 고생을 자초한다.
자청비는 결국 남자하인으로부터 성적인 수모까지 당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자청비는 이 사건 속에서 사랑의 경험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정수남이 알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벌써 자청비와 정수남의 사이에 성적인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넌지시 예고하고 있다.
정수남이 손톱으로 껍질을 벗겨 고기를 먹는 모습은 원시 수렵사회의 식생활을 연상시킨다.
학자들중에는 이 신화가 제주 주민들이 수렵생활에서 농경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신화의 서두에서 미개한 수렵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수남은 신화가 끝날 무렵 농경사회의 목축신으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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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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