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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신들 <4>
지금으로부터 7백24년 전 겨울이었다.
몽고(蒙古)군에 쫓긴 김통정(金通精)과 삼별초(三別抄)잔군이 제주(濟州)에 상륙했다.
이들은 지금의 애월(涯月)·한림(翰林)일대 백성들을 동원, 당시 귀일(貴日)촌위 [현재 항파두리]에 둘레 15리[6km]의 토성(土城)을 쌓고 그 안에 다시 둘레 7백50m의 석성을 쌓았다.
전해 관군들에 의해 동원돼 섬 둘레로 환해장성을 쌓느라고 생업에 종사하지 못했던 주민들은 다시 항파두리성을 쌓느라고 고초를 겪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마실 물도 없었다.
노역에 동원된 주민들은 목이 마르면 오줌을 받아먹고 똥을 누고는 다시 돌아앉아 그것을 먹었다.
김통정(金通精)은 또 가호마다 재(灰) 다섯 되, 빗자루 한 자루씩을 세금으로 거뒀다.
성을 은폐하기 위해 재를 성벽위에 뿌리고 빗자루는 말꼬리에 매달아 그 위로 달리게 했다.
성 위로 연기가 피어올라 온 섬을 덮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자 어데선가 세 신이 나타났다.
이들은 황서·국서·병서라고도 불리고 광양당신·광정당신·서낭당신이라고도 불렸다.
모두 한라산신들이었다.
세 신이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김통정(金通精)은 무쇠방패를 던져 타고 바다로 날아갔다.
사신용왕(四神龍王)이 깔고 앉은 방패를 잡아당겼다.
김통정(金通精)은 이번에는 매로 변하여 관탈(冠脫)섬쪽으로 날아갔다.
도망다니는 동안에도 김통정(金通精)은 무수히 칼과 활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김통정(金通精)의 몸에는 온통 비늘이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신 중의 하나가 모기로 변하여 김통정(金通精)을 쏘았다.
김통정(金通精)이 모기를 잡으려고 팔을 드는 순간 비늘이 일어서자 황서장군이 비늘틈으로 활을 맞혀 드디어 죽어 바다속에 수장됐다.
애월(涯月)과 한림(翰林)일대에서, 또 대정(大靜)읍 덕수(德修)리, 성산(城山)읍 삼달(三達)리, 안덕(安德)면 동·서광(東·西廣)리등지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황서·국서(또는 을서)·병서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세 신은 활을 쏘아 제주·대정·정의 삼읍을 나눠 다스렸다고도 한다.
이 세 신중 하나는 한라산(漢拏山)에서 정좌수따님을 만나 부부가 되어 일곱 오누이를 낳고 이 자녀들은 한림(翰林)읍 일대의 마을수호신들이 됐다고 한다.
황서국서가 한라산(漢拏山)에서 사냥을 할 때 였다.
마침 호근(好近)동쪽에서 정좌수따님이 나물을 캐러 왔다가 둘이 마주 쳤다.
황서국서는 정좌수딸에게 반하여 붙들고 희롱을 했다.
황서국서도 호걸이었지만 정좌수의 딸도 여걸이었다.
짐배를 끄르는 척 하며 얼른 황서국서를 나무에 묶어 버렸다.
『염치없는 짓 했으니 맛 좀 봐라』
정좌수의 딸은 캐어 놓은 나물을 들고 산을 내려오려고 했다.
나무에 매인 황서국서는 꼼짝없이 굶어죽거나 산짐승에게 잡아 먹힐 판이었다.
『아이고 살려줍서』
『내게 누님이라고 부르고 버르장머리를 고치면 살려주마』
『아이고 누님 살려줍서』
정좌수의 딸은 황서국서를 끌러주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에서는 저마다 정씨집안에 혼사를 들였으나 정좌수의 딸은 모두 거절하고 부모에게 말했다.
『내 남편은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허락을 말고 기다리십시오』
하루는 비가 퍼부어서 사방이 물천지가 된 날이었다.
한라산(漢拏山)에 사냥을 왔던 황서국서가 마새총(사냥총)을 든 채로 몸이 쫄딱 젖어서 거지꼴이 되어 인가를 찾아왔다.
정씨집에 들어오자 정좌수의 딸이 말했다.
『아버님, 저것이 내 남편될 자입니다』
그래서 황서국서와 정좌수의 딸은 부부가 되었다.
이들은 한림(翰林)읍 금악(今岳)리의 수호신이 됐으며 부부사이에는 일곱 오누이가 태어났는데 큰 아들은 동명(東明)리 종구실 고와니 축일(丑日)한집이고 둘째 아들은 명월(明月)리 하원당 축일한집, 세째는 천아오름의 남문밭당 축일한집이 됐다.
네 딸중에 큰 딸이 한경(翰京)면 조수(造水)리 산대받이 사신용궁도 축일한집이 되고 둘째가 저지(楮旨)리 당동산 중허리의 일뤠중조, 셋째가 한림(翰林)읍 상명(上明)리의 느지리 캔틈 축일한집, 막내가 금악(今岳)리 고련동의 갯거리 마봉오지 축일한집이 됐다.
애월(涯月)읍 고내(高內)리 「황서장군당」에는 황서장군을 섬기다가 신이 돼버린 사람도 있다.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세금이 과다하게 부과될 때였다.
이 마을 고흥석(高興碩)은 고기잡이 배를 들고 가서 제주성(濟州城) 밖에 팽개치고 목사에게 소리쳤다.
『고내(高內)사는 고흥석이 주세(舟稅)를 납부할 수 없으니 배로 받으시오』
고흥석(高興碩)의 힘과 배짱에 놀란 사또는 이때부터 주세를 받지 않아 백성들이 편안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세칫하르방」이라고 불렸으며 이 사람이 가는 곳에서는 신만이 할 수 있는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 마을 사람들은 황서장군과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미니해설
제주(濟州)시의 광양당·안덕(安德)면의 광정당·표선(表善)면 성읍(城邑)리 서낭당의 신 삼형제가 김통정(金通精)을 물리쳤다는 안덕(安德)면 덕수(德修)리의 광정당신화와, 황서·국서·병서 세 신이 김통정(金通精)을 물리쳤다는 애월(涯月)읍 고내(高內)리의 신화는 신의 명칭만 다를 뿐 신의 수나 줄거리가 같다.
근본적으로 같은 신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황서·국서·병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황서·국서·병서」로 통일했다.
또 이보다 앞선 시기에 형성된 광양당신의 신화[호종단(胡宗旦)을 물리치는 한라산신의 이야기]는 「탐라(耽羅)의 수호」라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세 신이 화살을 쏘아 전도를 나눠 다스린다는 구조는 고양부 삼성(高梁夫 三姓)씨의 시조신화와도 같다.
이 신화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광정당신화」에서 나오는 세 신의 위치가 옛 제주목(濟州牧)의 중심지인 제주(濟州)시와 옛 정의현(旌義縣)의 현청소재지인 성읍(城邑)리, 옛 대정현(大靜縣) 중심지인근의 덕수(德修)리라는 것이다.
즉 제주도(濟州島)는 옛부터 3개의 주민생활권이 형성됐으며 이것이 신앙권과도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 「정립(鼎立)」의 개념은고양부(高梁夫)신화에도 반영됐으며, 조선(朝鮮)시대들어 「삼읍(三邑)의 정립」으로까지 이어진다.
한림(翰林)읍 금악(今岳)리에서 이 일대 마을에 퍼진 일곱 오누이 신들의 부모는 「황서국서와 정좌수의 딸」이라는 신화가 있는가 하면 「최지국 아들과 정좌수의 딸」이라고도 한다.
전혀 다른 두 신화가 같은 신들에 대해 전래되고 있는 것.
「최지국아들」이라는 신의 명칭은 고려(高麗)말 2만5천여명이라는 병력으로 제주(濟州)를 정벌했던 최영(崔瑩)장군을 연상시킨다.
섬전체에 대한 이같은 대규모 정벌이 주민들에게 가했을 고초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高麗)말 무신정권의 잔재였던 김통정(金通精)이 역사가 바뀌어 현대에 이르러 영웅이 됐듯이 최영(崔瑩)은 중앙집권화된 후세의 사람들에게 신격화됐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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