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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백조의 아들들 <2>
금백조와 소로소천국 사이에는 열 여덟명의 아들과 스물 여덟 명의 딸이 있었다.
여섯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부부가 놀래 죽어 신이 되자 자녀들은 부모가 있는 구좌(舊左)읍 송당(松堂)리를 중심으로 도(道) 전역, 특히 섬의 동북쪽 일대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자손이 일흔 여덟 명이 됐다고도 하고 삼백 일흔 여덟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금백조의 아들들인 김(金)씨 하르방들은 저마다 마을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다른 신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들을 밀어내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때까지 제주도(濟州道)의 마을수호신들은 여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김(金)씨 하르방들은 저마다 이 여신들을 찾아가 결혼을 하고 웃자리를 차지한 후 마을 주민들의 호적과 장적을 차지하여 주인행세를 했다.
일단 자리를 잡은 김(金)씨 하르방들은 대부분 부인들이 더럽고 부정하다는등 갖가지 이유를 대어 그 전부터 마을을 차지해 온 이 여신들을 바람 아래로 쫓아냈다.
아홉째 아들로 알려진 「ㄷ′리산신도」는 한라산(漢拏山)으로 올라가 헤매다가 산굼부리 옆 비자나무가 있는 밭에서 조천(朝天)읍 교래(橋來)리의 마을수호신이었던 고(高)씨할망을 만났다.
고(高)씨할망과 결혼한 ㄷ′리산신도는 그녀가 목이 말라 산돼지의 발굽에 고인 물을 빨아먹었다가 콧구멍에 털이 났다는 이유로 굴무기나무[느티나무]가 있는 바람아래쪽으로 쫓아냈다.
조천(朝天)읍 와흘(臥屹)리 고평동의 열번째 아들 「괴뜨르산신도」는 한라산에서 짐승을 잡아먹고 살았던 신이기 때문에 사냥을 하는 사농바치들이 제를 지내면 산짐승이 많이 잡히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열 한 번째 아들 「논흘산신도」도 결혼을 하여 자리를 잡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논흘산신도가 한라산으로 올라가 좌정할 곳을 찾아 헤매던 때였다.
물장오리 태역장오리 민오름 굼부리로 큰길거리 작은 길거리를 거쳐 바농뱅뒤로 임추녀마루 기시내 오름 상상봉우리를 지나 개머리 동산까지 내려온 그는 외대박이[애꾸눈] 현씨 할아버지를 만났다.
『저기 논흘 한거리 만년 팽나무 아래 좌정한 게 누구냐』
『서정승 따님애깁니다』
『어찌 부부간이나 차려 사느냐』
『혼자 삽니다』
『그러면 명함이나 들여보자』
이렇게 해서 이 산신은 현(玄)씨 외대박이 할아버지를 통해 서정승 따님아기에게 명함을 들이고 부부가 되었다.
산신도는 사냥을 해서 살아가고 현씨 외대박이 할아버지는 산신도 곁에 앉아 얻어먹고 살았다.
서정승 따님아기는 일곱 아기를 낳은 후 식욕이 왕성해져서 노린 죽이나 검은 족발이나 머리고기 돼지 고기 할 것 없이 아무거나 먹었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마을아이들에게 물비리 강비리 홍허물 너벅지시등 질병을 일으켜 빌러오게 해서 제물을 받아먹었다.
이들이 살던 논흘당은 영험이 세서 조선(朝鮮)시대의 유교정책 일제(日帝)의 신당 철폐등 여러차례의 신당탄압조치에도 불구하고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이 당앞으로는 옛부터 중산간도로가 나 있는데 옛날에 이 당앞을 지날 때는 양반이나 상인이나 새 신랑이라도 반드시 말을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제주(濟州)시 외도(外道)동의 「돗당」에도 지금은 이름도 잊혀져 버린 한 여신이 살고 있었다.
활을 쏘우며 위압적으로 들어 온 김(金)씨하르방이 이 여신과 결혼했는데 이 여신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돼지고기를 먹어 냄새를 풍기는 통에 바닷가로 내려가 따로 살았다.
그녀는 외도천(外道川)의 포구로 내려와 아름다운 목백일홍 나무를 심어놓고 살면서 일천 잠수들의 숨비는 소리를 듣는 것을 낙으로 삼고 포구로 들어오는 배, 나가는 배들로부터 제물을 받아먹으며 살았다.
김(金)씨하르방은 장군처럼 허우대와 식욕이 좋아 밥도 큰 솥으로 먹고, 술도 동이로 먹고, 돼지를 잡아 바쳐도 통째로 먹어대는 통에 이 당의 이름이 「돗당」이 됐다.
제주(濟州)시 도두(道頭)동의 김(金)씨하르방도 금백조의 아들로서 한라산(漢拏山)에 올라가서 차지할 마을을 찾아 헤매다가 해안까지 내려 와 자리잡은 신이었다.
이 마을에는 원래 송(宋)씨할망이 있었는데 부부가 결혼을 하여 22명이나 되는 자손을 두어 인근 마을들의 수호신이 됐다고 한다.
애월(涯月)읍 수산(水山)리 서카름의 「세목당」에는 한라산(漢拏山)에서 내려 온 송(宋)씨할망 일곱형제중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김(金)씨하르방이 뒤늦게 도착하여 같이 살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이례적으로 송(宋)씨할망이 위세를 떨치고 주민들로 대접을 받았으며 김(金)씨하르방은 그 곁에서 얻어먹으며 살았다.
금백조의 딸들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제주(濟州)시 봉개(奉蓋)동은 김(金)씨할망과 양(梁)씨할망, 송(宋)씨할망등 네 신위가 수호하는 마을인데 이곳의 김(金)씨할망이 금백조의 딸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미니해설
금백조의 아들인 「김(金)씨하르방」에 대한 신앙이 이처럼 번창한 것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조선(朝鮮)시대이후 수백년동안 민간신앙에 대한 탄압이 집요하게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金)씨하르방당」은 널리 퍼졌으며 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을 제압하고 있다.
이같은 번창은 이 신앙이 오히려 정권의 비호를 받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이유는 어머니 신인 「금백조」의 신분에 있었던 것 같다.
금백조는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온 양반가문의 딸이다.
또 금백조의 아들들은 모두 「김(金)씨」라는 성을 부여받음으로써 그 이전의 신들에 비해 일종의 조상신적 성격을 갖게 됐다.
또 그 신들이 남성신이라는 것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있는 점이었다.
이 당들이 탄압을 비교적 덜 받게 된데는 신앙민들에게도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금백조와 김(金)씨하르방의 신앙민들중 웃자리를 차지하는 「상단골」은 대개 광산 김(光山 金)씨 가문이다.
광산 김(光山 金)씨가문은 도내에서는 명문가로 소문이 나 있으며 종친회의 단합도 아주 잘 되는 성씨이다.
조선(朝鮮)조 년간에도 관리나 학자를 많이 배출했는데 이러한 점들이 이 신앙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놨을 것이다.
자녀들이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은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濟州)출신의 아버지는 성이 없었으며 성을 못가진 신으로서는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조선(朝鮮)사회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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