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60<

아버지 병환 구하려 황소 잡아

황서 국서 어메장군
정승 막내아들 「상놈」전락…제주로 피난

성산(城山)읍 삼달(三達)리의 마을수호신은 목소리가 크고 담대한 장군으로서 청렴한 관리의 아들이었다가 제주(濟州)로 귀양온 신이었다.
옛날 서울에 황정승이 살고 있었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똑똑하고 유망하였기 때문에 집안이 날로 번창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어느 해 인가 황정승이 죽을 병에 걸리면서 떵떵거리던 가세는 갑자기 기울고 말았다.
황정승의 병은 희귀한 것이어서 백가지 약이 소용이 없었다.
다만 황소의 피를 받아먹으면 낫는다는 처방전이 내려졌다.
황씨 집안은 청렴하였기 때문에 재물과 권세욕에 눈이 어두웠던 탐관오리들에게 미움을 많이 샀다.
황정승이 황우혈(黃牛血)을 먹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소문이 어느 새 이 세도가들에게도 알려졌다.
백정들이 불려가 황소를 잡아 먹고 살아날까 두려워 한 이 세도가들은 백정들을 모두 잡아다가 가두어버리고 아무도 황씨집안에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병석에 누운 황정승을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아무도 황정승을 위해 소를 잡으려는 자가 없었다.
천금같이 믿었던 아들들도 피보기를 꺼려하여 황소를 구하기 위해 성밖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효심이 깊었던 나이 어린 막내 아들이 나섰다.
황소를 잡아 그 목에 참실을 걸어매고 대문간에 묶어두고는 황소의 귀에 대고 우뢰와 같은 고함소리를 질렀다.
황소는 놀래어 달아나다가 실에 목이 졸려 죽었다.
막내아들은 대청에서 그 피를 받아 아버지로 하여금 먹도록 했다.
아버지는 되살아났으나 한 번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잃었던 권세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으나 소를 잡았기 때문에 상놈의 신분으로 전락한 황정승의 막내아들은 역적으로 몰렸던 아버지를 살린 댓가로 제주도로 피난을 와야 했다.
황정승의 막내아들은 배포가 크고 힘이 좋았기 때문에 훗날 주민들에게 황서국서어메장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황도령이 구좌(舊左)읍 동복(東福)리로 들어와 장군혈을 밟으며 내려오다보니 허(許)풍헌이 성산(城山)읍 시흥(始興)리로 풍헌으로 부임해 오고 있었다.
참새로 환생하여 그 앞을 날아가고 있는데 허풍헌이
『어떤 짐승이 이렇게 앞을 어지르느냐』 호통을 쳤다.
『그만하면 풍헌을 할 만 하구나』
길을 비낀 황서장군은 종달(終達)리쪽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는 아낙네들이 삼태기를 들고 소금을 만들고 있어서 너무 강포하여 앉을 자리가 못되었다.
장군혈이 뻗어있는 시흥(始興)리 「큰물머리」로 갔더니 허(許)풍헌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구하나 반겨주는 이가 없어 구좌(舊左)읍 송당(松堂)인근의 높은 오름에 올라앉아 옥퉁소를 부노라니 밤이 새어 날이 밝았다.
한라산(漢拏山)에 올라가 오백장군오백선생을 구경해 봐도 인간이 그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의(旌義)고을 「멍둥마루」에 내려와 앉아보니 정의현(旌義縣) 관가에서 죄인들을 잡아다 족치는 것이 내려다 보여 양반이 앉을 자리가 못되었다.
다시 장군혈을 밟아 성산(城山)읍 난산(蘭山)리로 내려서니 「골미당」이 있어서 앉을 곳이 못 돼 「와갱이[삼달(三達리)리]」로 발길을 돌렸다.
『빈촌은 빈촌이라도 좌정할 만 하구나. 매밋물도 좋아지고 베릿물도 좋아지고 세숫물도 좋아진다』
삼달(三達)리는 도내에서도 양반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삼달(三達)리에 도착하니 이 마을 김(金)씨영감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김(金)노인의 꿈에 현몽한 황도령은 『백돌래[떡]에 백시리에 자소주를 제물로 올리고 너희집 상고팡[상고방(上庫房)]으로 위판을 모셔 위해 주면 살려주마』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살아난 김씨영감은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형통하게 됐다.
아이거나 어른이거나 병이 걸리면 신통하게 그 원인과 처방을 알아내고 치료하는등 영험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다.
어느 해 마을에는 아홉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죽게 됐다.
김(金)씨영감이 그동안 모아 뒀던 재물을 풀어 주민들을 구휼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특히 여겨 통정대부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 김씨영감은 죽기전에 시체를 묶지말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대로 했더니 삼일 만에 되살아나 그 때부터 영험이 좋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김(金)씨영감은 주민 경주 김(慶州 金)씨 김정희(金政熙)씨의 5대조 김대길(金大吉)이라고 한다.
경주 김(慶州 金)씨는 지금도 이 마을 신앙민중 윗자리를 차지하는 「상단골」이다.
김(金)씨영감도 황서장군과 함께 모셔지고 있으며 무덤도 현재 종달(三達)리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제주(濟州)에 유배·도피했던 인물 신화화한 듯

『옥퉁소를 불었다』는 표현이 이채롭다.
제주(濟州)의 개벽신화중에서 아들에게 버림받은 쉬멩이의 아버지가 저승에서 옥퉁소를 불어 염라대왕을 감동시켰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임금님의 밥상을 평민과 달라 「수라」이다.
임금이 약으로 끓여 먹었던 맹물은 「백비탕(百沸湯)」이라고 했다.
어른이 고기를 씹는 것은 아이들이 먹는 것과 달라 「저작(咀嚼)한다」고 한다.
문맥으로 보아 『옥퉁소를 불었다』는 것은 『목놓아 울었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 아닌가 본다.
점잖은 양반가문의 아들로서, 더욱이 훗날 주민들로부터 장군으로 추앙받을 인물로서 체통없이 소리내어 눈물을 흘릴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신화에 등장하는 황서장군이라는 명칭은 애월·한림·대정(涯月·翰林·大靜)지역에서 한라산신(漢拏山神)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황서·국서장군과 일치하고 있다.
신화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제주(濟州)에 유배를 오거나 도피했던 인물의 이야기가 신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래로 주민들 사이에 전해지던 민간신앙과 황정승의 이야기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황정승이라는 인물은 고려(高麗)말에서 조선조(朝鮮祖)까지 살았던 청렴한 관리 황희(黃喜)를 연상시킨다.
황희(黃喜)도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고 그에게는 신화에서 처럼 아들이 셋 있었다.
큰 아들이 보신(保身)이며 둘째 아들이 치신(致身), 막내아들이 수신(守身)이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조정의 관리가 됐으나 이중 막내가 가장 영달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황희(黃喜)의 후손중에 7년전쟁후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유배됐던 인물이 있다.
그 후손과 제주 황(濟州 黃)씨의 입도와의 관련여부와 입도조의 입도시기·사유등은 그 후손들에게도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수로 추정해보아 1천6백년대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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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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