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61<

성(城) 쌓을때 희생당한 소녀 마을수호신 돼

마을송사(訟事)담당 억울한 주민 이기게 도와줘

진안할망
성산(城山)읍 수산(水山)리의 여신「진(鎭)안할망」은 성을 쌓을 때 제물이 되어 파묻혀 죽었던 어린 소녀의 영혼이었다.
섬나라였던 제주(濟州)의 주민들은 먼 옛날부터 왜구들의 침략 때문에 고통을 겪어 왔다.
이 때문에 섬 동쪽 끝에 위치한 수산(水山)과 서쪽 끝의 차귀(遮歸)에 방호소(防護所)를 두었으며 성을 쌓아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의 이야기다.
인근 마을주민들은 모두 동원되어 부역을 했으며 이외에 따로 공출을 당해야 했다.
마을주민들이 다 공출을 냈는데 유독 한 여인만 아무 것도 내놓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고 있으니 당신도 무엇하나 내놓아야 할 것 아니요』
서슬퍼런 공출관리의 엄포에 여인이 쩔쩔 매고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울어댔다.
『집안에 남은 것은 애기들 밖에 없으니 저 애기라도 가져갑서』
집은 가난하였지만 애기는 많아서 열 두엇이나 됐다.
기가 막힌 관리는 허허 웃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축성작업은 왠 일인지 진행되지 못했고 성을 쌓으면 이유없이 자꾸 무너지곤 했다.
마침 그 때 지나가던 스님 하나가 말했다.
『왜 주겠다는 아기를 받아다가 바치지 않으시오. 열 세 살 잔나비[원숭이]띠의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성을 쌓으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그때서야 얼마 전의 일을 생각해낸 공출관리는 다시 그 집에 가서 아이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망설임없이 냉큼 건네줬다.
어린 소녀를 땅에 묻고 그 위로 성을 쌓으니 과연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성은 무사히 완공됐지만 어느날부터인가 밤마다 소녀의 우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마을의 한 아낙네가 제사를 지낸후 퇴물을 조금 갖다놓으니 그때야 울음이 그쳤다.
처음에는 수호신으로 모시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영험도 좋았다.
이 신은 마을의 송사(訟事)를 담당했다.
이기는 송사를 지게 하고 지는 송사도 이기게 하는 신이었다.
벼슬길에 오르려는 자나 시험을 치르는 자의 앞길을 도와주는 신이 됐다.
이 성은 수산진(水山鎭)이 됐는데 사람들은 이 신이 사는 곳이 진(鎭)안에 있다하여 「진안할망」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이때 쌓았던 성벽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쌓았던 성은 지금 수산(水山)국민학교의 담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북쪽 벽 아래에는 지금도 「진안할망」이 사는 당이 있다.

관청할망
그 무렵 정의(旌義)고을[지금의 표선(表善)면 성읍(城邑)리]에는 원님이 도임하여 「그문동산」에 상서집[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사령·급장·나졸들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목욕탕을 구분하여 위에는 남자 목욕탕, 아래는 여자목욕탕을 만들었다.
또 아침의 「금종법」과 저녁의 「토종법」을 마련했는데 아침에는 북을 치면서 주민들을 일어나게 하고 저녁에는 다시 북을 쳐서 통행을 금지시켰다.
원님이 큰 일을 많이 했으나 혼자 살자고 하니 낮에는 때식[식사] 얻어먹기가 힘들고 밤에는 심심하였다.
원님은 동네 어른들을 청해서 『인물 좋고 바느질 잘 하고 밥도 잘하는 새각시를 구해달라』고 말했다.
성읍(城邑)리 어른들은 육지 광청고을로 가서 「예동지 따님아기」를 데려왔다.
앞 뒤가 훤하고 솟아나는 샛별같은 아가씨가 방으로 들어서니 원님이 깜짝 놀랐다.
『몇 살이나 났느냐』
『열여덟입니다』
『널 밥해 달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너하고 나하고 부부가 되어 벗해서 살자』
『저는 이왕 희생 당하려고 온 몸이니 좋을 대로 하십시요』
둘이 부부가 되어 연삼년을 살다보니 원의 임기가 다하여 돌아갈 때가 되었다.
사령, 급장, 나졸을 불러 모시게 하고 예동지따님아기에게 돈 천냥을 주어 고향으로 가라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 알고 둘은 모른 사또님아 나는 가도 부모 형제간 다 돌아가시고 애기도 없어 무휴하니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또님은 어서 고향으로 가십시오. 난 여기 살겠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죽으면 옥황[하늘]에 진정을 들여서 마을 수호신이 되고 주민들이 지어주는 제사나 받아먹고 살겠습니다』
『할 수 없다』
막상 헤어지려고 하니 섭섭해서 잔치를 벌였다.
성방청[형방청(刑房廳)] 이방청 다 나오게 하고 마을 웃어른들 청해놓고 일류 심방들을 데려다가 소를 잡고 천(天)제 국(國)제 거리제를 벌여 마을잔치를 했다.
그러고도 섭섭하니 마을마다 올래마다 거리마다 다니면서 네고 돌아[거리제] 곡식을 받아 창고 가득 쌓아놓고 여인에게 주고는 떠났다.
그래도 섭섭하여 쌍가마를 다 내놓고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피리를 불게하여 어른 아이 기생 할 것 없이 춤을 추며 놀았다.
춤을 추며 동서남문들 다 돌아 「국문동산」에서 하마하여 이별을 했다.
원님은 고향으로 가고 여인은 큰 집에서 살았다.
이 여인은 굶는 백성은 구휼하여 살려주고 마을의 송사를 담당하여 억울한 주민들이 송사하면 이기게 하고 벼슬길에 나선 사람들의 앞길을 밝혀 주었다.
이 여인은 죽어서 영주산앞 「탈낭밭」에 묻혔다고 하는데 죽어서도 실력이 좋아 주민들을 도와줬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행정중심지 이동 따라 신앙 변천″

수산(水山)리의 신화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성을 쌓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옛 주민들의 원한이 서려있다.
주민들은 방어시설의 구축에 동원이 됐으나 정작 주민들의 마을은 이 성의 바깥 즉 해변쪽에 있었다.
군인들은 땅을 지키는데만 골몰했으며 주민들의 보호는 등한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성을 쌓거나 큰 종을 만들면서 산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전설은 적지 않다.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바쳤을 수도 있고 나중에 신화를 지어냈을 수도 있다.
성산(城山)읍 수산(水山)리의 여신 「진안할망」과 표선(表善)면 성읍(城邑)리의 「관청할망」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성읍(城邑)의 「관청할망」은 주민들 사이에 「광청할망」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신의 직능이나 의미로 봤을 때 「관청할망」이 맞는 것 같다.
두 신은 모두 관(官)의 주변에 있으며 송사와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다.
제주(濟州)시의 「운주당 한집」이나 대정(大靜)의 「가운당」등도 대개 비슷한 직능을 가졌던 당들인 것으로 보인다.
수산(水山)은 군사요새지였으며 성읍(城邑)은 현청소재지였다.
고대에 중심지였던 성읍(城邑)은 해안변이 중시되면서 다른 마을들처럼 발전을 하지 못했다.
그대신 산남(山南)지역에서는 서귀포(西歸浦)가 행정중심지로 발전을 했는데 서귀포(西歸浦)에는 언제부터인지 이곳 자구리해안에 「관청할망」에 대한 제의가 지내지고 있다.
수산(水山)리에 방호소가 설치된 것은 문헌상 조선(朝鮮) 세종21년[1439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성읍(城邑)이 제주삼읍(濟州三邑)의 현청소재지가 된 것은 이보다 앞선 태종 16년[1416년]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 비로서 삼읍(三邑)이 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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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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