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63<

스스로 무덤파고 들어가 굶어죽어

“내남편 죽인 자(者)와 살다니…다 죽여줍서”

매고할망
애월(涯月)읍 광령(光令)리에는 마을수호신에 대한 당제를 지낼 때 반드시 그 내력을 읊고 위하였던 할망신이 또 하나 있었다.
남편과 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굶어 죽어서 누구 하나 제사를 지낼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은 한 여인의 혼령이었다.
정식으로 이 할망에게 제의를 지내지는 않았으나 굿중에는 꼭 그 내력을 읊고 제가 끝날 때 쯤이면 따로 잡식을 하여 그 서러운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이 여인이 살던 마을은 지금은 폐촌이 돼 버린 광령(光令)리 인근의 「비신굴」이었다.
옛날 사람이 살던 곳은 「굴」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이 많았으며 이 마을에는 사냥을 하는 유목민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高麗)말 이 마을에는 아리따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앞집에 사는 무지렁이같은 총각이 이 처녀를 사랑했는데 처녀는 총각의 사랑은 아랑곳없이 한 마을의 다른 총각에게 시집을 가버렸다.
이를 시기한 무지렁이 총각은 비오는 어느날 그 여인의 남편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굴 속으로 밀쳐 죽이고 혼자 돌아왔다.
남편이 며칠 째 돌아오지 않아 행방불명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인근 야산과 산 깊은 곳까지 모두 찾아 헤매었으나 아무데서도 찾지를 못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됐을 때였다.
생과부가 된 이 여인은 몇 년을 혼자 살았다.
이 여인을 사랑한 무지렁이 총각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는데 여인의 일이라면 궂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가리지 않고 정성껏 도와주곤 했다.
몇 년이 흘러 옛 남편의 기억도 희미해졌다.
총각의 정성에 감복한 여인은 드디어 이 총각과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됐다.
여인은 새 남편이 옛 남편을 죽인 자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부는 오래 같이 살면서도 한 번 다툼이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한 해에 하나, 두 해에 하나씩 아들을 낳으니 아들도 일곱형제나 되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마당에 빗물이 떨어져 부구국 부구국 거품을 일으키며 떠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가 와서 사냥도 못가는데 뭐가 좋아 웃엄소』
이유없이 웃는 것이 이상해서 여인은 무슨 연유인지 말해달라고 다그쳤다.
『내가 말을 해도 괜찮겠소』
『늙으막에 무슨 숨길 일이 있소』
남편은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옛 남편에 대한 기억도 없어진데다 아이들도 일곱형제나 되어 행복하게 사는데 제가 어쩌랴 싶어 그 때 일을 모두 말했다.
『마당에 빗물이 옛날에 이녁[당신] 서방 죽어갈 때 흘리던 핏물같아 웃었소』
다 늙어서 어쩌랴 싶어 한 소리였지만 여인은 그때야 진상을 알고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그 시체는 어데다 두었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어 본 여인은 다음날 소 아홉 마리에 길마를 지워 나무하러 가는 양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깊은 굴 속에서 전 남편의 유골을 발견한 여인은 슬피 울고 유골을 수습하여 마을로 돌아왔다.
옛 남편의 뼈를 가지고 관가에 간 여인은 자기 남편을 벌해달라고 청원했다.
『비신굴 아무게는 내 남편인데 살인자입니다. 내 남편을 죽이고 나와 결혼하여 살았는데 이때까지 살인자인지도 모르고 함께 살며 아들형제를 일곱이나 낳았습니다. 다 죽여줍서』
엎드려 통곡을 한 여인은 횡설수설하면서도 지난 일을 모두 고했다.
『어찌 네가 낳은 걸 다 죽이랴, 하나는 살리라』
『이런 종자 놔 뒀다가 씨 전종(傳種)하면 어쩌리까. 다 죽여줍서』
이렇게 해서 남편과 자식을 다 죽인 여인은 자신의 무덤을 파고 눈비야기쿨[익모초] 기름을 한 허벅 짜서 그 속으로 들어갔다.
기름을 접시에 부어 불을 밝혔다.
무덤에는 작은 구멍만 남겨두었는데 그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되면 그 구멍만 막아달라고 마을사람들에게 부탁해 두었다.
일곱명의 아이들은 여인이 직접 죽여 묻어버렸다고도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여인을 「매고할망」이라고 불렀다.
이 끔찍한 사건이 있은 후로 사람들은 비신굴에서 하나씩 떠났으며 이윽고 아무도 마을에 살지 않아 폐촌이 돼 버렸다.
현재의 신천지미술관 동쪽 「비신굴」에는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매고할미무덤도 그곳에 있었으나 언젠가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져 이제는 흔적도 없다고 한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제주판 고려장」풍습 신화화 아닌가 추측

「매고할망」과 비슷한 「마고(麻姑)」나 「마고할미」라는 이름이 우리나라 다른 지역의 전설에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원래는 중국(中國)의 여신의 이름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단순히 「노파」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제주(濟州)에서는 묻혀죽은 노파라는 뜻에서 「매고(埋姑)할망」이라고 불린 게 아닌가 추측된다.
살아있는 채로 무덤 속에 들어가 갇혀 죽은 이야기는 이 곳 뿐만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다.
제주(濟州)시 봉개(奉蓋)동에는 「봉개무덤」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무덤도 고려(高麗)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이 곳에는 「봉개」라는 선비가 묻혔다고 하는데 그는 늙어 죽을 때에 이르자 일꾼들을 시켜 묘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종나무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죽을 때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선비는 『불이 꺼지면 죽은 줄 알라』는 유언을 남기고 무덤으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은 이후 이 무덤을 「봉개무덤」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고려(高麗)시대에는 늙고 병든 노인을 깊은 산중에 버리거나 구덩이를 파서 방치해 두었다가 죽으면 그대로 무덤을 만드는 「고려장(高麗葬)」이라는 장례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제주(濟州)에서 실제로 있었던 장례풍습에 따라 생긴 이야기인지 장례풍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지 모르나 광령(光令)리 「비신굴」과 봉개(奉蓋)동 「봉개무덤」의 이야기 속에서 이 무덤들은 모두 고려(高麗)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濟州)에는 부모를 매장하는 장례풍습이 없다가 조선(朝鮮)시대 기건(奇虔)이 제주(濟州)목사로 파견된 1443년께에야 장례법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모두 고려(高麗)시대의 이야기인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제주(濟州)판 고려장」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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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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