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65<

조천·구좌 손(孫)씨 집안 조상신(神)

임따라 제주(濟州)배 타려다 횡사한 여인(女人) 원혼

광청아기
먼 옛날 조천(朝天)읍 신흥(新興)리 출신의 손(孫)씨집안에는 「광청아기」 또는 「여동지 따님아기」라고 불리는 조상신이 있었다.
손(孫)씨는 아니었지만 이 집안에 시집오려다 비명횡사한 여인으로서 손(孫)씨 자손들은 대대로 이 여인의 원혼을 위로하여 조상이나 다름없이 대했다.
섬나라인 탐라(耽羅)가 한반도에 복속되어 하나의 지방으로 화했을 때 였다.
나라에서는 바다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탐라(耽羅)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군인의 수가 모자라 백성들 속에서 병정을 차출하여 바다를 지키도록 했다.
토양이 부박하고 흉년이 많은 섬이라 백성들이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섬을 떠나 육지로 가는 일이 많아지자 병정의 수도 줄었다.
조정은 이들이 섬을 떠나지 못하도록 출륙(出陸)금지령을 내리고 몰래 섬을 빠져 나가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처벌했다.
특히 여자는 더욱 섬을 나가기가 힘들었으며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육지로 나갈 수 있는 배는 나라에 진상을 하는 배이거나 물건을 싣고 나가 팔고 섬에 필요한 물자를 사 들여오는 상선 몇 척에 불과했다.
이때 조천(朝天)읍 신흥(新興)리 출신 손(孫)씨영감이 미역장사를 하고 있었다.
잠수들이 따오는 미역을 받아 모아두었다가 몇 달에 한 번씩 큰 배를 빌어 육지로 싣고 나가 팔고 옷감이나 곡식, 또는 다른 물건으로 바꿔 들여 오곤 했다.
어느 해 인가 제주(濟州)에 들어오기 전에 광청고을의 여동지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다.
밤이 깊어 삼경이 다 되어도 잠이 들지 않아 마당으로 나섰는데 별채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호기심이 동한 손(孫)영감이 손가락으로 창구멍을 뚫고 들여다 보니 꽃다운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주인집의 외동딸인 「여동지 따님아기」였다.
혈기왕성한 남정네였던지라 손(孫)영감은 앞뒤 가릴 새 없이 방안에 들어가 정을 통하고 말았다.
여동지 따님아기는 이날 밤에 임신을 했는데 그 사실을 안 때는 손(孫)영감은 이미 제주(濟州)로 떠나버린 후였다.
제주(濟州)에 온 손(孫)영감은 여동지따님아기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여 잠을 못 이루다가 미역을 다시 수집하여 광청고을로 들어갔다.
밤이 이슥하여 다시 여동지따님아기의 방으로 들어가 회포를 풀었는데 여동지따님아기가 훌쩍거리며 우는 통에 이번에는 그냥 방을 나올 수가 없었다.
『영감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알면 청댓섶[잎]에 목 걸려 죽입니다. 아무데건 데려다 줍서』
제주(濟州) 여자가 육지에 나가지도 못하고 육지 여자가 제주(濟州)에 들어가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손동지는 고향에 딸이 셋이나 있는 몸이었다.
고민을 하던 손(孫)영감은 아무도 몰래 아기씨를 데려가기로 했다.
포구에 배를 대도록 한 손(孫)영감은 『밤 깊어 삼경에 이르걸랑 포구로 와서 배를 타시오』하고 당부를 했다.
여동지 따님아기는 밤 늦도록 바느질을 하여 제주(濟州)에서 만나게 될 손(孫)영감 딸 삼형제의 옷을 고운 물색 천으로 지었다.
삼경이 되자 그 옷들을 보자기에 싸 들고 선창으로 나왔다.
술에 취한 손(孫)영감은 한(韓)씨 사공에게 여동지따님아기를 배에 태우라고 말하고는 선실로 들어가 잠이 들어버렸다.
남이 알면 큰 처벌을 받을 일이라 겁이 난 한(韓)사공은 아기씨가 배에 오르기 위해 발판 위로 올라서 세 발자국째 걸을 때 그만 발판을 빼 버렸다.
바다에 떨어진 여동지따님아기는 간 곳 없이 사라졌다.
손(孫)씨영감이 누워 자다가 깨어 보니 배는 제주(濟州)물마루로 들어섰는데 배에 탔어야 할 아가씨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배에 타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한(韓)사공의 말을 듣고서야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을 알았다.
구좌(舊左)읍 김녕(金寧)리 「한 개」포구로 배를 댔으나 영감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손(孫)영감의 세 딸이 마중을 나왔다가 배 위에 놓인 고운 보자기를 보았다.
여동지따님아기가 바다에 빠질 때 사공들이 건져놓은 보자기였다.
보자기를 들어내려 열어보니 진녹색 저고리에 연반물치마, 예쁜 옷 세 벌이 있었다.
세딸이 기뻐하며 그 옷을 입었는데 그 때부터 말을 못하고 미쳐 버렸다.
여동지따님아기의 혼이 들린 것을 알게 된 손(孫)영감은 큰 굿을 하여 그 원혼을 풀었다.
손(孫)영감의 막내딸에게 들린 원혼은 『제사·명절을 지내고 나면 광 속에 밥 한끼씩만 올려달라』고 말했다.
마음이 착한 혼인지라 큰 궂은 일은 없었으며 손(孫)씨 집안에서 조상신으로 모셔주기 시작하자 집안이 오히려 잘 됐다.
그래서 요즘도 손(孫)씨가문이나 한(韓)씨가문에서는 광에 밥 한 끼를 더 올리는 집안도 있고 굿할때는 그 내력을 아뢰어 원혼을 풀곤 한다.
물에 빠져 죽은 혼인지라 남자든 여자든 이 혼에 들리면 몸이 물에 젖어 식은 땀을 몹시 흘리며 바닷물을 마신 듯 트림을 하게 된다고 한다.
또 남자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행패를 부리게 되고 여자는 미쳐버리게 된다고도 한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출육금지(出陸禁止)」 쓰라린 역사속의 애환

집안의 조상중에 특이한 내력을 가진 선조가 있는 경우 조상신으로 숭배되는 경우가 있다.
「광청아기」 또는 「여동지따님아기」로 불리는 이 여신은 손(孫)씨나 한(韓)씨가문중 일부 집안에서 모시는 조상신이다.
이 신화가 성립된 것은 제주(濟州)의 역사중에서 가장 쓰라린 역사중 하나인 「출륙금지(出陸禁止)」의 관행때문이었다.
출륙금지는 제주(濟州)가 현으로 편입된 고려(高麗)때부터 있었으며 조선(朝鮮)시대인 1830년까지 부정기적으로 행해졌다.
제주(濟州)에 외세가 처음으로 상륙한 삼별초(三別抄)직후 몽고(蒙古)는 일본(日本)원정에 필요한 전선 1천척을 고려(高麗)에 요구했는데 이때 제주(濟州)에도 1백척이 배정됐다.
배를 짓는 고역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육지로 달아나는 경우가 생기자 고려(高麗)는 「탐라도누인물추고색耽羅逃漏人物推考色」이라는 관서를 만들어 달아난 주민들을 잡아들여 엄히 처벌했다.
또 탐라(耽羅)의 호족인 고·양·부(高·梁·夫)씨가 좌도지관·우도지관 직책을 반납하여 평민이 되고 중앙집권정책이 활발히 추진되던 1천4백년대초에도 출륙이 금지됐었으며 1629년[인조(仁祖) 7년]에 다시 내려진 출륙금지령은 1830년[순조(純祖)말]까지 약 2백년간 이어져 악명을 떨쳤다.
의녀 만덕여인이 흉년에 사재를 털어 구휼을 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임금을 알현하게 되어 육지땅을 밟았을 때도 출륙금지되던 기간중이었다.
만덕은 이 기간중 육지땅을 밟았던 유일한 여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차별대우를 받으며 강제로 이 섬에 살아야 했으며, 다른 지역의 여인들과 결혼을 하지도 못했던 당시 주민들의 애환이 신화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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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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