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69<

풍수지리에 신안(神眼) 「신화적 지관(地官)」

해괴한 목사(牧使)꿈 해몽…후일 「전적(典籍)」벼슬 얻어

고(高)전적 <1>
제주(濟州)에 「고(高)전적」과 「월계 진(秦)좌수」와 「문(文)곡성」이라는 세 명인이 있었다.
신화적 인물인 이들은 그 능력이 탁월하여 「삼신안(三神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高)전적은 지리에 능해 땅 밑의 일이라면 모르는 일이 없었다.
월계 진(秦)좌수는 고금에 유래없는 명의(名醫)로서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신기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문(文)곡성은 점술에 뛰어나 앞을 내다보기를 망원경 보듯 했다고 한다.
고(高)전적은 머리가 총명했으나 서자출신이어서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
서당에 다니면서도 스승에게 쇠꼬챙이로 찔리는등 학대를 받으며 공부했다.
스승으로서는 학문에 전념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나 고(高)전적으로서는 원한에 사무치는 일이었다.
후에 전적(典籍)벼슬을 얻어 「고(高)전적」이라고 불렸으나 벼슬을 하기 전에는 제주(濟州)시 이호(梨湖)동 「가물개」 출신으로 「가물개 고(高)생원」이라고 불렸다.
어느 해 스승인 김(金)훈장이 죽자 묘자리를 보게 됐는데 당시 제주(濟州)에서는 제자인 고(高)생원이 가장 지리에 밝아 고(高)생원이 이 일을 맡았다.
고(高)생원은 지형이 좋기로 이름난 곳을 선택하여 장사를 지내도록 했다.
워낙 좋은 터였고 제주(濟州)에서는 명지관인 고(高)생원이 택한 곳이라 누구하나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몇 년 후 김(金)훈장의 제자인 소(蘇)목사가 제주(濟州)목사로 부임해 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리에 능통한 자를 지방목사로 보내는 때였는데 소(蘇)목사도 누구 못지않은 지관(地官)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소(蘇)목사가 제주(濟州)에 도착해보니 김(金)훈장은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을 수소문한 그는 스승의 묘지에 성묘를 가기로 했다.
묘지에 도착한 소(蘇)목사는 깜짝 놀라 물었다.
『이 묘자리는 누가 봤느냐』
『가물개 고생원이 봤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蘇)목사는 묘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평지에 젯자리를 펴게 하여 절을 했다.
김(金)훈장이 묻힌 곳은 풍수지리상 바람이 흐른다는 「풍질」이어서 땅 속에 묻힌 시신이 아래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내의 지관들을 모두 소집시켰다.
『묘소가 잘못 되었으니 이장해야 겠다』
소(蘇)목사는 김(金)훈장의 묘소근처에 자리잡고 앉아 지관들로 하여금 정자리를 찾도록 했다.
지관들이 모두 실력을 발휘하여 정자리를 찾아 보고를 했는데 고(高)생원만은 머리를 수그리고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왜 자리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느냐』
『목사님이 일어서면 자리를 보겠습니다』
소(蘇)목사는 이미 정혈을 찾아 깔고 앉은 채 다른 지관들에게 찾아보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네 놈이 잘 알면서 일부러 나쁜 자리를 썼구나. 이 놈을 포박해라』
스승에게 학대를 받아 원한이 있었던 고(高)생원은 나쁜 자리인 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썼던 것이다.
고(高)생원은 당장에 하옥되고 말았다.
고(高)생원이 옥중에 있는 동안에 소(蘇)목사는 께름칙한 꿈을 자꾸 꿨다.
무릎 위에 도장통을 올려놓으면 자꾸만 떨어지는 꿈이었다.
불안해진 소(蘇)목사가 부하들에게 물었다.
『해몽할 만한 이가 제주(濟州)에 없느냐』
『가물개 고생원밖에 없습니다』
고(高)생원을 불러오라고 시켰으나 고(高)생원은 안나가겠다고 버텼다.
『사또가 둘이냐, 어떤 사또는 들어가라고 하고 어떤 사또는 나오라고 하느냐』
하는 수 없이 관원은 통사정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목사앞에 간 고(高)생원이 딴전을 피웠다.
『감옥에 갖혀 있으니 정신이 몽롱하여 지금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허 이 놈이 강짜로구나』
소(蘇)목사는 할 수 없이 고(高)생원을 풀어주고 푹 쉬도록 한 다음 해몽을 들었다.
『모래 사오시가 되면 좌익장(左翼將) 유지(諭旨)를 대령할 게고, 다음은 우익 유지, 세 번째는 어영도대장(御營都大將) 유지가 당도하겠습니다』
『그게 틀림없는가』
『예 제 해몽이 틀리면 이 목을 바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그 때가 되니 배가 한 척 들어오더니 좌익 유지를 갖다바치는 것이다.
그 다음 배는 우익 유지, 세 번째 배에는 어영도 대장의 유지를 갖다 바치는 것이었다.
고(高)생원을 죽이려고 벼르던 소(蘇)목사는 고(高)생원의 신안에 감탄했다.
그는 어영도대장으로 서울로 올라가며 고(高)생원을 같이 데리고 갔다.
『고(高)생원 공은 무엇으로라도 갚겠소. 소원이 무엇이요』
『문과에나 한 번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高)생원이 문과 벼슬을 원하니 소(蘇)목사는 그를 성균관(成均館)의 전적벼슬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실제인물 고홍진(高弘進) 신격화한게 아니냐 추측

제주(濟州) 삼신안의 이야기는 학계를 중심으로 많이 채집된 얘기다.
「고전적」은 고봉래(高蓬萊)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실제 인물인 고홍진(高弘進)으로 알려졌다.
또 「월계 진좌수」는 한림(翰林)읍 명월(明月)출신인 진국태(秦國泰)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곡성」은 「곡성(谷城)」의 현감을 지냈기때문에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동시대인으로서 친구처럼 같이 다녔다고도 전해지는데 실제 인물들의 연대를 보면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홍진(高弘進)은 1602년생으로 조선(朝鮮)시대 선조-숙종(宣祖-肅宗)때 인물로 현종(顯宗) 7년 65세의 나이에 성균관(成均館)에서 실시한 식년시에 합격하여 전적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이원진(李元鎭)이 제주(濟州)목사로 있었던 1653년 이(李)목사와 함께 「탐라지(耽羅志)」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부 전설에는 고전적, 즉 고홍진(高弘進)이 명도암 김진용(明道巖 金晋鎔)선생의 제자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김진용(金晋鎔)은 1605년생으로 출생연도로는 오히려 고홍진(高弘進)보다 나이가 아래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월계 진좌수는 조선(朝鮮)시대 영조(英祖)때 인물로 고전적과는 시대적으로 다른 시기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세 인물이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신격화됐다.
김진용(金晋鎔)선생이 거주하면서 마을이름이 「명도암」이 된 제주(濟州)시 명도암에는 뚜렷한 연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고전적을 모시는 「도욕남밭당」이 있었다.
이 당에는 신병(神病)이 들렸으나 심방이 되지 못해 숨진 고전적의 딸에 관한 신화가 남아 있다.
이 당의 「고전적」이 명지관(地官)인 고전적과 같은 인물이었는지 다른 인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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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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