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73<

뛰어난 의술(醫術)만큼 기이한 행적도

임금의 등창병(病) 사흘만에 고쳐 「좌수」직함

월계 진좌수 <3>
월계 진좌수는 진료경력이 화려한 만큼 기이한 행적도 적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제주(濟州)에 부임한 목사가 도미요리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렸다.
당장에 죽을 큰 병은 아니었으나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목이 아파 며칠째 음식을 먹지못하고 끙끙 앓았다.
보다 못한 육방하인들이 지금의 한림(翰林)읍인 명월진(明月鎭)에 사는 진좌수를 천거하자 목사는 대뜸 진좌수를 제주성내로 불러들였다.
진좌수는 고기가시가 걸린 정도로 오라가라하는 소리가 마땅치 않았으나 목사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성내로 들어왔다.
목사가 진좌수를 보니 거동이 괘씸했다.
성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막신을 신고 오는가하면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손은 뒷짐을 지고 관덕정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마당에 즐비하게 늘어섰던 하인들이 진좌수에게 귀띔을 했으나 진좌수는 목사에게 인사도 않고 아무 말 없이 뻣뻣이 서서 딴전을 피웠다.
『이런 건방진 놈이 있나.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너같은 놈에게 내 병을 맡길 수는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목사가 호통을 쳤는데 그 바람에 목에 걸렸던 가시가 튀어나와버렸다.
그제서야 목사 앞에 엎드린 진좌수는 병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고 아뢰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가시가 튀어나와 목이 다 나아 있었다.
하루는 양반집 가문에서 부인이 다 죽어 간다고 진좌수를 청하러 왔다.
베틀에서 명주를 짜던 중에 북이 떨어지자, 그것을 주우려 하다가 그만 기절해 버렸다는 것이다.
진좌수가 따라가 봤지만 양반집 부인이라 진맥도 해 볼 수 없었다.
환자의 방 밖에 선 진좌수는 부인의 손목에 실을 묶고 그 실을 문틈으로 내보내도록 하여 진맥을 했다.
진맥을 한 진좌수는 문을 조금만 열도록 하고는 침통을 꺼내 환자의 복부를 향해 침을 던졌다.
침이 부인의 배에 가 꽂히자 부인은 곧 숨을 내쉬고 살아났다.
너무 힘이 들어가게 짜면 실이 끊어지므로, 밥도 안 먹고 배를 고프게하여 명주를 짜다가 북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빈 창자가 맞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진좌수가 침을 놓아 창자를 떼 놓으니 살아났다는 것.
가족들이 모두 신기한 의술에 감탄했다.
또 한 번은 성내에서 한 남자가 술을 먹고 잠이 들어서 영영 깨나질 않고 그냥 죽어버렸다.
성안에 있던 내노라하는 의사들이 다 그 연유를 몰랐는데 진좌수가 보고는 한 눈에 알아맞췄다.
술을 마실 때 안주로 먹은 산돼지털이 염통을 찔러 숨졌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끝에 남편을 죽인 여인을 잡아내 처벌한 얘기로도 전해진다.
길을 가다가 여인의 곡소리를 들은 진좌수가 거짓울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리고 여인을 추궁, 남편이 술을 마시고 취해 자는 사이에 죽인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진좌수의 의술이 널리 알려져 전라도(全羅道)에 까지 이름을 떨쳤을 때였다.
서울에서 임금님이 병이 나 팔도의 명의들을 부르자 진좌수의 명성을 아는 전라(全羅)감사는 곧 진좌수를 추천했다.
진좌수가 의술로 많은 사람을 살렸으나 진료비는 제대로 받지 않아 가난하게 살았다.
조정에 입고 들어갈 의관도 없어서 허름한 차림새로 갔는데 진좌수의 옷차림을 본 전국의 명의들은 진좌수를 자신들의 곁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진좌수는 할 수 없이 방밖의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정승댁에서 왔는데 어머님이 길쌈을 짜다 죽어 가니 처방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명의들은 임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중이라서 누구 하나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 방바깥에 쭈그려 앉았던 진좌수가 『쌀 일곱 알을 물에 담가 먹이시요』하고 말했다.
진좌수가 환자는 보지도 앉고 처방을 하자 방안에 앉았던 의원들이 미친 녀석이라고 모두 웃었다.
조금 후 그 사람이 다시 와서는 『덕택으로 어머님이 살아났습니다. 정승께서 청해 오시랍니다』하며 억지로 진좌수를 데리고 갔다.
정승이 몸소 마중 나와 극진히 사례하고 사흘동안이나 융숭한 대접을 한 다음 진좌수를 안내하여 궁중으로 들어갔다.
팔도의 명의들이 모두 진료를 했으나 임금의 병은 그때까지도 낫지를 않고 있었다.
임금의 병은 등창이었다.
진좌수가 곧 방문을 냈는데 집 상마루에 있는 거미집과 거미 일곱 마리를 잡아 오도록 하고는 그것을 찧어서 임금의 등에 붙였다.
그러자 3일만에 임금의 등창병은 깨끗이 나아 버렸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그 의술을 높이 칭찬하고 궁중에서 벼슬을 하라고 하였다.
진좌수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다고 극구 사양했는데 그래서 임금이 좌수직함이라고 내리라고 하명하여 그때부터 좌수로 불렸다고 전한다.
진좌수가 고향으로 돌아 올 때 배를 타려고 보니, 뱃사공이나 손님들이 다 금방 죽을 사람들이었다.
잠시 있다가 또 한 사람이 배를 탔는데 관상을 보니 그 사람만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하고 같이 타면 괜찮겠거니』 하여 진좌수도 배를 탔다.
배가 제주에 닿아 진좌수와 그 사람이 내리자 갑자기 돌풍이 불어 배가 뒤집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3백년전(前) 사회·생활상도 표출

진좌수가 생존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백년전쯤이라고 한다.
진좌수의 일화는 그의 놀라운 의술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思考)와 행동양식, 사회·생활상도 담겨 있어 흥미를 끈다.
가장 많이 전해지는 임산부들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길쌈을 하다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달하는 이야기들 속에서는 당시 집안에서만 갇혀 살았던 양반집 여인들의 애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민들은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데다 약이 없어 문지방까지 깎아 살라먹을 정도였는데 목사나 임금등 고위층에서는 가벼운 병만 걸려도 큰 일이나 난 듯이 법석을 떨었다.
물고기의 뼈가 목에 걸린 정도를 가지고 죽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제주(濟州)목사나, 등창이 났다고 전국의 의사들은 물론 물 건너 제주(濟州)의 의사까지 모두 소집시키는 궁중의 관행은 당시 귀족계급·관료들의 권위주의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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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2nd February,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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