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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성 6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부끄러움과 반성을 모르는 반인류 퇴보종족
왜구족!
왜구족의 가장 큰 특이점은 주둥이로
떠드는 소리와 사실과의 연관성이 제로를 넘어
반연관성 극대점 타격인 점!
일극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다극
인류공존시대가 열리는, 인류사 대전환의
주요요인들에는, 미국의 태평양방어선 후퇴에
따른 일본열도 폐방기와, 일본열도의 대양침몰과
연결되는 일본왜구족의 멸단종이 포함된다.


김상수 55분 ·
이것을 우연히 벌어진 행태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일본의 총리 ‘여자 아베' 다카이치의
의전 전용 승용차 번호 37-77이 중국과 심지어
일본에서도 논란을 낳고 있다. 수많은
숫자 중에서 굳이 37-77이란 숫자를 골라 차량
번호로 선택한 의도는 뭘까?
단순한 숫자 조합처럼 보이지만 특정 역사적
날짜와 정확히 겹친다. '37-77'은 1937년
7월 7일이다. 중국이 '77사변'(七七事變)이라
부르는 노구교(盧溝橋) 사건이 일어난 날짜로,
일본군과 중국군이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충돌한 뒤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역사적 날짜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 발발의 기점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숫자로 대단히 민감한 사안으로
여겨진다.
노구교 사건은 사건이 일어난 다리인 '노구교'에서
유래한다. 1192년에 완성된 석조 아치교로,
난간에 새겨진 수백 개의 돌사자상으로
유명한 중국어 발음 '루거우차오(盧溝橋)'를
그대로 표기한 이 사건의 발단은 1937년
7월7일 밤 베이징 남서쪽 외곽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야간 훈련 도중 일어난 병사 실종
사건을 중국군 탓으로 돌리며 베이징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인 노구교를 점령한 사건이다.
행방불명된 병사는 20여분 뒤에 원대복귀했지만
일본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나섰다. 이 사건은 8년간 지속된
중일전쟁의 직접적인 발화점이 되었다.
Wikipedia에 글을 발췌 인용,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하였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칠만큼 기세등등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이어졌다.
일본군 예상처럼 다른 지역 중국 국민당
군대의 저항은 손쉽게 처리했지만, 상하이
전투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하이 전투에
참가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였고, 이들이 일본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다. 여기에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 지연과 작전실패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을 향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고, 일본군은
분노에 휩쌓였다.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곧바로 중화민국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인류 전쟁 역사에서 처참한 일본군에
의한 중국인 약 20만 여명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이 벌어진다.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 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강간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오늘날 중국은 이를 난징 대도살(南京大屠杀,
南京大屠殺, Nánjīng Dàtúshā)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ナンキン じけん)으로
칭한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일어난 이 중국인 대학살은 난징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무너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능력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쳤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토막살을 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이다.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 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일본 대중들은 이 살인 경쟁에 열광했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작년에 중국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돼 중국인 3억명 이상이 이
영화를 보았고, 난징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확산, 다시 조명됐다. 난징(南京)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난징으로
찾아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빌면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중국은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진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 인사들이
난징 대학살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과장되었다는
이른바 부인론을 내세우거나, 교과서에서
언급을 피하거나 축소하는 등의 일로 중국
측과 대립하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와
연관된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한국인 중국인
혐오를 퍼트린 이시하라 신타로로, 그는
1990년 당시 도쿄도지사로 한 잡지의 인터뷰를
통해 "난징 대학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로 중국내 반일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꾸민 얘기"라고 주장했고, 죽을 때까지
그 주장을 고수했다. 이런 주장에 중심
정치인이 혐한론을 조직적으로 퍼트려 자기
정치에 악용힌, 9년동안 총리를 한 아베 신조가
있고, 아베의 지원을 받아 정치인으로
부상한 ‘여자 아베‘ 현 총리 다카이치가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하여 20만
명설, 15만 명설, 1만 명설, 3천 명설, 심지어는
일본 극우익 진영에서는 40~50명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 봐야 1~2명 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이러한 일본 극우 난징 대학살
부인 부정파들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일본
극우 세력을 비판하며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나는 재미 중국인 아이리스 장이 쓴 영문
한국어 번역책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을 읽었다.
아이리스 장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사이에 6주간 일어난 난징 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으로 1997년 영미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이 책은 저자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에 관한 자료조사에 기초하여
서술했으며, 저자는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1931년~1945년사이에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
대학살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웅변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대사를 생방송으로 주미
일본대사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제대로
논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이리스 장은
미국내 중국인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아이리스 장은 일본우익들로부터
여러 야비한 직접적인 협박에 시달렸으며 2004년
11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 총리 다카이치의 공식 차량에 붙은
번호판 '37-77'은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번호판 문제가 보도되자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상징성을
의식한 조합 같다", "그녀가
과거 이용했던 도요타 JZA70 수프라 역시 동일한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일본 총리 차량 번호판을 과연 우연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의 후견인이었던 죽은 아베가 총리 시절에
했던 엽기적인 과거 행각도 다시 문제 제기되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13년 5월,
항공자위대 기지 방문 시 '731'이라는 식별
번호가 부여된 훈련기에 탑승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실험 부대인 만주
'731부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미야기현 히가시마쓰시마시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하여 곡예비행단 '블루
임펄스'를 시찰했다. 이 과정에서 아베
총리는 T-4 훈련기의 조종석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이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문제의 훈련기 동체에는
'73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 사진은 한국, 중국 등 과거 일본 제국주의
침략 피해국들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당시 아베의 이 행동은
일본의 과거사 반성 부재와 극우경화 행보의
상징으로 해석됐다.
731이란 숫자, 731부대는 만주 하얼빈에
본부를 두고 한국인,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잔혹한 인간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였다.
이 사건은 일본 우익 극우 정치인들이 아베
전 총리의 역사 몰이해 몰인식에 합류하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인간 생체실험을 했던
일본군 마루타부대 731 세균전 부대를 부정했던
전 일본총리 아베, 난징 일본군 대학살
만행을 부정하는 현재 일본의 총리 ‘여자
아베' 다카이치의 숫자 놀음. 일본군 피해국인
중국과 한국인들을 대놓고 내놓고 기호나 숫자
조합으로 과거사를 부정한 아베 총리와 다카이치.
다카이치 총리를 가리켜 조선일보 등이
“보수 성향이 뚜렷하고 국방·헌법
이슈를 꾸준히 강조해 온 인물” 따위로 말하는
것은 이해와 인식의 의도적인 오류다. 전쟁범죄자를
떠받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고개를 숙인
아베와 다카이치, 이들의 이런 배경은
이번 번호판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 중국뿐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중론으로
거론되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치적 계승자를 자임하는
다카이치 총리는 단순하게 “보수적 행보를
이어온 총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일본
극우 국가주의 사악함의 화신이다. 미친 것이고
사악한 짓이다.
작금의 중일충돌은 한반도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지금 다카이치 총리 일본내 여론조사
지지율이 70%~75%라고 한다. 일본이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 조만간 일본 안에서 다카이치를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정치 정국을 나는
예상한다.
사진 - 일본군의 중국 침략으로 약 20만
명의 중국인 난징 대학살 도화선을 일으킨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발발인 일본군이
중국의 노구교‘루거우차오(盧溝橋) 부근에서
일본군 병사 실종 사건을 구실로 중국군을
공격하며 시작된 사건 날자를 총리 승용차
번호판 37-77로 달고있는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 (高市早苗) /
다카이치를 유력 정치인으로 키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전 해상자위대
하사관 출신 야마가미 데쓰야(山上 徹也)가
원한을 가진 통일교와 아베가 관계되어 있다고
여겨, 이에 불만을 품고 아베를 암살한다.
일본 우익 극우주의 상징인물로 현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를 지원했다. 사진은 아베가
생체실험 부대 이름 ‘731’ 적힌 비행기 타고
엄지 척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과거사 부정의 사악한 행동이었다.
미국의 군사정보지는 “독일 총리가 나치
옷 입은 꼴”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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