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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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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전수자 이유립의 민족주체사관]

최진섭
2일 ·

<환단고기 전수자 이유립의 민족주체사관을 아시나요?>

예전에는 민주:독재, 진보:보수의 대립에 신경 썼는데,
얼마 전부터는 민족:외세, 민족주체사관:사대식민사관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수십 년 동안 민주당 정부로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지만
민족, 북한, 미국 문제에서는 큰 차별성이 없었다.
그 주요 원인의 하나는 역사관, 민족정신의 문제라고 본다.

이재명 대통령이 촉발한 ‘환단고기 논쟁’에 가장 진보적인 역사학자로 손꼽히는 한홍구 교수도 참전했다.
그가 어제 올린 유튜브 영상의 제목은 “환빠논쟁, 현대연구자의 눈으로 본 ‘황당고기’”이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다.
1시간 분량의 이 황당한 강의를 보고 반론을 쓰려 했는데,
한 교수가 할 말이 많은지 이어서 2부를 올리겠다고 해서 그 영상을 본 뒤에 쓸 생각이다.

<환단고기> 논쟁에 관심 있는 이는 엮은이인 계연수(평북 선천 생, 1920 사망)와
현대에 전수한  이유립(1907~1986)이라는 인물을 아는 게 중요하다.
불교, 기독교를 알고 싶을 때 경전 이전에 석가와 예수의 삶을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듯이.
독서가 취미라고 하는 사람 중에도 이들의 이름을 아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수년 전 <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2022)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알게 됐다.
관련 자료를 찾던 중에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1983)라는 책(175*245의 큰 사이즈에다 834쪽에 달하는)을 보게 됐는데,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가보로 여겨도 될 만큼 귀한 책이었다.
책 뒤의 판권을 보니 이 책의 편집자가 잘 아는 출판사 사장이었다.
그에게 연락해 보니, 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이유립 선생 밑에서 역사 공부를 했다고 한다.

시인을 만난 뒤에 그가 쓴 시집을 읽으면 오감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이유립 선생이 쓴 글을 읽고, 그와 함께 지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환단고기>를 살펴보니 느낌이 달랐다.

민족주의계열의 역사가를 사이비, 유사, 환빠로 매도하는 이들은
이유립의 글 중에 일부를 트집 잡아 친일유림, 극우 역사학자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유립 선생은  '민족주체사관'에 철저한 역사학자였다.
그가 1986년 4월 18일 사망했을 때 <경향신문>은
"한중일 삼국의 고대 문헌 연구를 통해 일제식민사관의 불식을 주장해 온 이유립 씨는 특히 고구려 역사의 올바른 기술을 역설했다."라고 적었다.
이유립은 김부식의 신라중심사관을 거부하고 고구려중심사관을 세우려 했다.

이유립은 1907년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고 만주에서 성장했다.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주요 인물의 태반은 대종교(1909년 나철이 단군교로 창시) 교인이었다.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김두봉 등도 그에 속한다.
이들 대종교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이유립은 1919년, 13세 되던 해에 만주 관전현(고향 삭주의 압록강 건너 편)에 있는 배달의숙에서
<환단고기> 편찬자인 계연수와 오동진 등의 독립운동가에게 역사강의를 들었다.
스승 계연수는 1920년 일제 밀정에 살해되고, 그가 보관하던 사서 수천 권도 소각된다.

계연수는 호남의 3대 수재로 손꼽히던 해학 이기(1848~1909) 문하에서 역사공부를 했는데,
이기는 나철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도모하다 실패해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기-계연수-이유립은 역사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신채호처럼 독립운동에 참여한 역사학자였다.
스승 계연수가 일제 밀정에 의해 암살당한 뒤에도 이유립은 독립군 사이의 통신연락을 돕는 소년통신원으로 활동하고,
해방 직전에는 건국동맹 삭주책을 맡았다.

‘신탁통치 반대’(1946) 글이 문제가 된 뒤 1948년 월남한 이유립은
1952년에 정치혁명민족협의회라는 조직사건에 걸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검찰은 이들이 "행동강령은 외세배격, 남북민족사상통일, 국토통일 등"을 내걸고,
왕정복고(왜적의 볼모가 된 영친왕 리은을 구해야 한다며)를 꾀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역사저술에만 몰두했는데, 기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대주의 신라정통론을 배격한 전.중.후 고구려로 이어지는 고구려 정통론의 확립
-신라의 부조리한 반반도 통일 이후의 사대주의 사관, 속국사관, 노예사관 비판
-정신적인 지나인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해독은 "왕명을 팔고 나라 땅 판" 이완용보다 더하다고 비판
-김부식은 의도적으로 고구려, 발해, 가야를 무시하고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
-고려의 사대주의는 일면 독립, 일면 사대의 한 방편적 재량이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주의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심리적 사대주의라고 비판
-기자묘와 함께 조선 유림의 숭명 사대주의를 보여주는 수치스러운 흔적은 충청도 화양동 만동묘(명나라 칭송).
-불교,유교,기독교 사대주의, 미국, 일본 사대주의, 이병도 식민사관 비판.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을 통하여 단결된 주체사관의 주도적 세력부터 형성해야 함을 강조.

이상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은 아래에 첨부한 사진이나  <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지낼 때 역사공부를 함께 했던 양종현 씨(당시 고등학생)는 <백년의 여정>(2009)이라는 책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박정희 정권 시절에 거침없이 미국을 비판해서 어린 마음에 혹시 '간첩이 아닐까' 의심을 한 적도 있다고 적었다.

"미국은 분단책임의 일편이며 형태와 대상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자각하고 어떻게해야 할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도 역사공부의 목적 중 하나라는 것이다."(백년의 여정, 155쪽)

1980년대에 이유립 선생을 모셨던 C 출판사 사장은 “선생님께서는 유달리 산을 잘 타셨다.
상계동에 사실 때는 수락산을 자주 가셨는데,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산을 오르내릴 때 뜀박질을 하셨다.”라고 증언했다.
그가 산을 잘 타게 된 것은 어릴 때 독립군 통신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압록강을 통해 만주벌판으로 넘나들 때 추운 낙엽 속에 파고 들어 밤을 지새우며 생명을 건진 이야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독립군 시절 느린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느린 건 곧 죽음이기 때문이라 했다.”(<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 230쪽)

산 좀 타 본 사람은 안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이런 정신을 지닌 민족사학자 이유립이 스승 계연수가 목숨 걸고 쓴 책을 현대에 전수한 것이 <환단고기>다.

*C 사장은 1980년대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 아침에 라면 서너 개를 한꺼번에 끓여서 아침에 드시고,
점심 저녁 때 얼어붙은 라면을 다시 끓여 드시는 경우도 목격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C 사장은 의식주에 신경 안 쓰고 연구, 저술에 몰두하는 이유립 선생을 도와 국립도서관, 대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주는 일을 도왔다.
그 과정에 편집한 책이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1983)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