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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연평도 포격전과 이명박 정권의
한반도 긴장관계]






Nam
Gi Kim님이 사진첩에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김남기의 역사이야기 2 2시간 ·
2010년 연평도 포격전과 이명박 정권의
한반도 긴장관계
올해 8월 대학 동창과 함께 백령도를 여행했다.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1박 2일 동안 여행했다.
현재까지도 한국 본토에서 백령도를 가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인천 시민들에게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표가 제공되지만, 비인천
시민에게는 절대 친절하지 않은 가격으로 표가
제공된다. 인천에서부터 백령도까지는 대략
배로 3시간 30분에서 많게는 4시간 가까이
걸린다. 서해바다에 있는 섬을 가는데 그 정도로
배를 오랜 시간 타본 것은 이번 백령도 여행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백령도행 배편은 항상
대청도와 소청도를 들린다. 물론 백령도를
가는 길에서 다른 곳을 들릴 수도 있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 연평도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번
백령도 여행은 배를 타고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지도를 오래 보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지난번 탄 배가 연평도 인근을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연평도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0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철없던 시절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다는 뉴스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대치하여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뉴스를
통해 생생히 체험했으니 말이다. 그날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초등학생이었고, 이명박 정권기
중고등학생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은 남북관계가
희망적으로 비추어지던 시점이라, 사람들이
잘하면 남북이 통일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명박 정권 초기만
하더라도 실제 남북관계가 악화된 것과는 별개로
북한과 평화롭게 통일해야 한다는 참여정부
시기의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중학교에서도 통일에
대한 글짓기를 반강제로 시킨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결국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고,
한반도 관계는 매우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 인생에서 남북의 지도자가 만나는 것은
2007년 노무현-김정일 만남과 2018년 문재인-김정은의
만남이었다. 11년이라는 공백의 기간 동안
남북 관계는 결코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된
시점은 이명박 때였다. 그리고 악화된 남북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연평도 포격전일
것이다. 연평도 포격전은 내 또래 나이의 청년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 당시 너무
어렸던 친구들은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아예 없겠지만, 중학생이던 나는 북한하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시달렸다.
그때 느꼈던 공포감은 전혀 작지 않았으며,
텔레비전에 나온 포격 당하는 민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따라서
우리는 노무현 정권 이후 탄생한 이명박 정권
시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2007년 대선(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탄생한 정권이었다.
그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던 이명박과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나온 정동영 그리고 무소속으로
나온 이회창은 각각 48.67%, 26.14%, 15.07%
득표를 얻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후보로 당선 된 이후 10년 만에 정권이 다시
교체가 된 것이다. 사실 글쓴이의 기억 속에
있는 대통령 선거는 2007년 대선이 시작이었다.
그 시기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정치인인
것도 알게 됐다. 대선 당일날 글쓴이는 부모님과
함께 투표장소에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투표하는
것 자체가 나한텐 신기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어르신이
기호2번 이명박을 찍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것을 우연히 봤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내 부모님은 항상 민주당을 지지했기에, 그
당시에 정동영을 투표했다는 것을 크고 나서
알게 됐다.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추진했다.
2008년 1월 16일 이명박 정부 출범을 준비하던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합쳐 외교통일부로 개편하겠다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말만 통폐합일
뿐 사실상 통일부를 없애겠다는 발표였다.
그리고 2008년 3월 26일 이명박 정부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열린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 부정을 공식화했으며,
그 대신 ‘비핵·개방·3000 구상’을
대표 대북정책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전 정권에서 걸었던 노선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이 시점부터 북한은 여러 사설을 통해 이명박에
대해 역도라는 강력한 어조와 욕설로 응답했다.
즉, 북한이 이명박에 대해 생쥐나 쥐새끼로
표현하게 된 것도 이러한 악감정이 쌓이면서
이후 언어로 표현된 셈이다. 그 당시 글쓴이는
중학생이었기에 잘 몰랐지만,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던 사이 남북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이명박의 움직임은 이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시위와 명박산성 그리고
4대강 사업 발표 등에 대한 진보 언론의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가장 큰 만행은
바로 이 남북관계 문제에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08년 7월 11일 남북관계에 큰 악영향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금강산
관광을 갔던 한 50대 여성이 군사지역에 잘못
들어갔다가 북한 측 보초에게 사살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해당 사건의 경우 그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박왕자씨 피격
사망과 관련해 유감을 표시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것을
기회삼아 기존에 진행하던 금강산관광을 완벽히
중단시켜 버렸다.
2008년 이후 미국 대선에서는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어 정권이 교체됐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전 정권인 부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고도 볼 수 있다. 참고로 오바마 정권은
부시가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더
많은 미군 병력을 투입하여 전쟁을 장기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2011년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색깔혁명으로 전복시켜 지옥으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 희대의 대역죄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한때 오바마에 대한 미화가
나부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오바마는
정말로 악랄한 미국 제국주의자였다. 이명박은
부시와 오바마 정권의 미국과 북한 문제에
있어 항상 협조했다.
한계레의 이제훈 기자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강경파와 손잡고 ‘북핵 검증’을
빌미로 6자회담의 좌초를 도모했다. 그들의
바람대로 2008년 12월 8~11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처 검증방법 합의에 실패했고, 6자회담은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됐다. 사실 2008년 북한과
미국은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6자회담 합의 사항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시엔엔>(CNN)의 생중계 속에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했다(2008년 6월27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적성국교역법’
적용 해제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지시했다.
국무부는 그해 10월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고 발표했다. 즉, 이명박
정부는 회담 결렬에 따라, 미국 네오콘들의
목적대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을 이렇게 막았다.
2009년 북한과 미국 사이에도 긴장이 돌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2009년 3월 미국의 두 동양계 여기자가 북중
국경지대에 있던 북한 측 경비대원에게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두 여기자는 한국계 미국인
유나 리와 과 중국계 미국인 로라 링이었다.
사실 이들의 경우 중국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서 체포되었다는 게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들이 북한에 들어간 목적은 당연히 미국에서
주장하는 북한 인권 관련한 선전용 영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즉, 북한이 이들에게 처음에
노동교화형 12년형을 괜히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해당 기자들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서
두 기자는 8월에 석방됐다. 비록 여 기자가
석방되면서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이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남북관계의 악화는 2010년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2010년 3월 26일 서해 백령도 부근에서
경비활동 중이던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대잠수함 전투 훈련 중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총 46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의 경우
4월 중순부터 북한이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의심을 토대로 한때 조선일보에서
인간어뢰를 발사했다는 가짜뉴스가 퍼지기도
했다. 사실 글쓴이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 누가
했는지 아직 결론내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의심이 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심이 나오면서 북한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 강도를 강화했다. 북한 정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 강력히 부인했고, 필요하다면
남한과 협력할 조사단을 파견하겠다는 의견도
밝혔다. 그 의견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천안함 사건은 북한이 한 것으로 화자되고
있다.
2010년 11월 23일 정말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연평도에서 포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군은 서해의
섬 연평도에 최소 수십 발에서 많게는 170발
이상의 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에서
일하는 민간인 2명과 해병대 2명이 사망했고,
16명의 군인이 부상당했다. 추가적으로 민간인
3명이 부상당했다. 한국군 또한 반격을 했기에
북한군 또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 북한 스스로가 낸 사상자 추정치가
없기에 어디까지나 탈북자들과 자칭 소식통을
통해 추산된 추정치일 뿐이다. 나무위키에서
인용한 여러 소식통과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소 5명이 전사하거나, 많게는 10명이 전사
및 30명이 부상, 그리고 전사자 없이 부상자만
10명일 수 있다. 정확한 규모는 아직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의 경우 사실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북한이
남한에게 훈련중단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몇 시간 전 북한은 2010년 11월
23일 오전부터 남북장성급군사회담 북측 단장
명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영해에
대한 포 사격이 이루어질 경우 즉각적인 물리적
조치를 경고한다.”는 통지문을 발송했다.
그 당시 한국군이 실행하던 호국 훈련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던 셈이다. 결국 대한민국 국방부는
훈련중단 요청을 거부하고 예정대로 훈련을
진행했다. 그러나 오전 10시 15분부터 오후
2시 24분까지 4시간 동안 연평도에 주둔한
해병대는 3,657발의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즉,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군의 포격
행위는 해당 군사훈련에 대한 맞대응이었다는
것이다.
훈련 종료 10분 후인 오후 2시 34분 북한군은
포격을 시작했고, 연평도 군부대 및 인근 민가가
해당 포격을 받고 파괴됐다.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발표에 따르면, “이 가운데 수십 발이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로 떨어졌다”고 한다. 즉, 민간인
피해도 그렇게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이 의도적으로 민가를
포격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포격 당시
민가에 떨어지긴 했으나, 즉 민가에 포를 쏘는게
북한군의 교리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사실
사망한 민간인 2명의 경우 군부대에서 일하는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북한이
포격을 가한 곳이 군사교리상 민간인 구역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무위키의 경우 북한이
남한에게 요구한 훈련 중단의 경우 그리 큰
훈련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되는 입장도 있다. 그 당시 군사전문가이던
김종대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군은 북한 반대쪽, 그러니까 후방으로
(포탄을) 쏜 것은 아니었다. 사격 원점에서
탄착점까지의 거리보다, 탄착점에서 북한 해안까지의
거리가 더 가깝다. 사격 규모도 과거에 있었던
통상적 훈련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과거에는
이런 정도의 훈련을 할 만한 화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70년대에 105mm 견인포를 이 도서에
배치했고, 여러 화기로 사격을 한 바 있으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어떤
메시지가 있는 훈련으로 볼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북한에서도 탄착지점에 물방울이 튀는
게 다 보일 정도였다. 너무 근접했다. 당일
3,600여 발을 쏜 것은 예년 수준에 비해서는
굉장히 많은 것이다. 통상적 훈련이 아니라
무력시위에 가깝다.”
일본의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자신의
저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에서
북한의 입장이 다음과 같았다고 서술했다.
“북한 외무성은 다음날 성명을 발표했다.
연평도 일대가 민감한 지점이므로, 한국 측에
이 섬에서 실시하는 포격훈련을 중지하도록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연평도는 해상 군사경계선에서
우리 쪽 영해 내에 깊이 들어와 위치해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그곳에서 대포의 실탄사격을
실시하면 어느 방향으로 쏘더라도 포탄은 우리
쪽 영해에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국
측이 23일 오후 1시부터 연평도에서 포격할
때 북한과는 반대쪽인 남측을 겨냥하기는 했지만,
결국 수십발의 포탄은 모두 북한 영해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북한이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 측에 북한이 연평도 주변 수역을
한국의 영해로 인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오도해나가려는
의도가 있다고 여겨 이를 겨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신들이 포격진지를 공격한
것은 자위조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논리적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루끼의 말대로 북한의 설명이 크게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 포격으로 대한민국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것과 민가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마 1994년 3월에 나온 북한의 불바다 발언이
준 충격보다도 훨씬 컷던 것 같다. 실제로
포격과 사망자까지 나왔고, 언론에서도 이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 당시 생각했었다. 다행히도
전면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실제로
북폭까지 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다.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쓴 회고록에 따르면, 이명박이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공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더 나아가 F-15 전투기로
북한 폭격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2015년
12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인 “MB, 연평도
포격 때 F-15로 北 폭격 지시했다”에서 확인
가능하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한반도는
정말로 전쟁직전까지 갔었던 것이 맞다. 그런
점에서 연평도 포격 사건이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해당 사건은 천안함 사건과 더불어
반북주의자들이 북한에 대한 반북선전을 하는데
자주 이용하는 정훈의 소재이기도 하다. 실제
원인을 보면, 과연 북한만의 일방적인 책임인가를
의심해볼만 하지만, 그러한 의심을 하지 못하게
이들이 사회를 만들고 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의 교훈은 북한의 도발이
아니라, 한반도 긴장관계는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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